누군가의 놀이터에서,
돌아봤다, 내가 있었던 지난 4개월을. 아니, 실은 한 해를 톺아본 된 계기가 되었다.
어느 회사에 수습기간을 가지고 입사를 하게되었다.
벌써 4번째. 그저 열심히 살았던 것 뿐인데, 누군가는 끈기가 없다거나 혹은 내가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입사를 하자마자 내가 들었던 사수의 첫번째 조언은 '한숨을 쉬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조언은 '말을 빨리하라'. 경상도 여자로 태어나서 말이 느리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 나였지만, 그녀는 연차가 나에 비해 10년은 더 많았기에 존중하고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세번째 그녀의 조언은 '사업을 하라'며 나의 명의를 빌려달라는 식의 얘길 꺼냈다.
이게 무슨... 황당한 마음에 여러모로 돌려서 거절하느라 혼이 많이 났다.
사수, 라고 부르는 그녀는 실은 프리랜서로 회사에서 일을 했기에 엄밀히 말하면 사수도 아니었다.
자칭 박애주의자였던 나는 그저 그녀의 경력과 살아온 삶을 함께 애정하며 대단히 여겼을 뿐이다.
그런 나를 어떻게 봤는지는 그녀만 알 것이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동업 제안과 명의 도용 시도를 요리조리 피해다니느라 지쳤달까.
어느 날, 나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아, 이게 가스라이팅이구나.
여기저기 호기심이 많았던 나, 가스라이팅의 원칙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당하는 줄은 전혀 몰랐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이스 피싱'에 비유했다. 그저 사고였고, 보통은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하니까.
1. 나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
2. 나와 주변의 사람들을 끊어낸다.
3.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낸다.
3단계에서 알아챘다. 결국, 그녀는 자신과 내가 비슷하다는 점을 앞세우며, 자신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나를 부정하는 순간이 와버렸다.
그것에서 벗어나니 또 다른 언덕을 발견했다.
대표, 그는 다른 면에서 엄청난 변수였다.
그녀를 치워내고 직면한 대표의 모습은 '매니저'라고 불리는 급의 사람들만 볼 수 있는 모습에 해당했다. 들어보니 그는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쉽게 보이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가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불리는 정말 말 그대로의 '나르시스트' 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다 알고 있다'며 자신만 믿으라고 회유했다. 결국은 나를 수습기간 이전에 프리랜서로 전환하며 1개월 계약 이후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것은 정말 대수롭지 않았다. 오히려 수영장을 가자며 '비키니 입은 여자를 보면 코딩이 잘된다'는 발언이나, 회의를 하면서 대형 모니터 앞에 승마 기구에 앉아 허리를 흔들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 남았을 뿐,
아직도 나를 새벽녘에 깨우는 일들은 아마도 그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4달간 한창 나는 매일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러고는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하며,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울어버리기도 했다.
거리를 둬야한다. 아니, 그 곳을 떠나야한다.
괜히 연륜이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였다.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 알았는데, 생계가 걱정되어 쉽게 놓지 못한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를 닮아 사랑이 많고,
아버지를 닮아 냉철한 긍정을 가진 나는
그곳을 하루 빨리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삶의 큰 교훈을 얻었다며 마무리를 지었다.
버릴 경험은 없다는 것을 혀를 차며 용기내어 그만 둔 첫 회사에서 배운 것을 세번 째 회사에서 활용할 때 느꼇던 나의 마무리는, 그곳에서의 성장만을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내게 '후안흑심'이라는 책을 선물해주시며
책 앞에 '즐겁게 살자' 라는 한 마디 만을 적어주셨다.
후안무치(厚顔無恥): 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이 없음.
낱말 사전에 검색한 결과이다. 누가 어떠한 뻔뻔함을 가지고 부끄러움이 없었을까, 나는 있었을까.
이념이고 합리성이고 이전에 염치가 있고 자의식이 있어야 사람이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외롭다- 김규항 아포리즘」에 이런 말이 있다.
어느 단계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수정란, 아니 난자 한 개라도 한부로 다루어선 안될 생명이지만, 진정한 인간은 '부끄러움을 아는 단계'부터다.
사회적 이견을 가진 사람은 존중할 수 있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존중할 순 없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존중이 필요한 사람과 불필요한 사람을 분류하여 군집화 하기로 다짐했다.
박애주의자가 편견이라니, 편견없이 사랑하기로 다짐했던 올 한해를 다시 돌아보게 된 계기까지, 중용을 실천하고자 하지만 박애에 가까운 지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를 상처입히는 꼴이 되었던 것을 깨닫게 된 감사한 경험이었다.
나무랄 것 없이 사랑받고 자라,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숲이 되고자 하였지만
바다를 항해하며 파도를 맞아보니 어쩌면 '바다라고 했던가'라는
최유리의 대중화된 '숲'이라는 곡의 가사와 맞닿아 있는 나날을 보냈는지도.
항해를 하던 나는 지금 바다 한 가운데 잔잔하게 있는가,
그것은 나도 잘 모르겠다.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 친구들에게는 '뱃멀미의 후유증'이 남았다고 설명하곤 했다.
유난히 탈이 많았던 올 한해는 그저 아홉수였다며,
돌아보는 날에는 웃어 넘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새벽에 이 글은 마무리하고 눈을 붙여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