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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밤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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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식 Jan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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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파리라니

혼자, 그것도 파리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넘쳐날 12월에?!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침착하자. 그냥 의향을 물은 것 뿐이다. 어쩌면 떠보는 걸 수도 있다.


아름답고 따듯한 연말 가족여행을 선택할래, 남편과 애를 집에 두고 너 혼자 호화스럽게 유럽여행을 독차지할래? 후후후…


이 교활한 책략가 같으니라고. 내가 쉽게 계략에 넘어갈 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요동치는 감정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

마른 침을 삼키고 하고자 하는 말이 오해없이 전달되도록 건조하게 말을 건넸다.



- 진심이야?



남편의 답변을 기다리는 찰나가 화장실이 급해 죽겠는데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를 잘 못 누른 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 응. 계속 가고 싶어 했잖아.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야지.

- 떠보는 거 아니지? 나 진짜 간다? 니가 가랬다?!



남편과 전화를 끊고 항공사 어플을 열었다. 설레어 주책 떨 시간이 없다. 고민은 발권을 늦출 뿐이다.


마일리지 항공권 예매

인천 출발 - 파리 도착

12월

일정은 일주일


클릭 클릭 클릭

클릭 클릭 클릭


클릭. 클릭.

클릭.


출국 비행기가 있으면 입국 비행기가 없고 입국 비행기에 맞추면 체류기간이 너무 길었다.

연말인데다 임박한 일정이라 그런지 출발 시간도 마음에 딱 드는 건 모두 예약마감이었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꽉 채워 일주일인데 이틀을 허무하게 날리는 시간이었다.


다들 파리만 가나.


볼멘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오는 비행기는 대기할까 하는 모험적인 생각을 하며 항공사 어플을 닫고 숙박예약 어플을 열었다.


파리

투어 에펠

12월

성인 1명


응?

내가 보고 있는 숫자를 뒤에서부터 다시 셌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까지 셌는데 한 자리가 더 남아 있었다. 백….만.

백 만… 그래, 5일 숙박이니까 백만 원이 넘는 건 당연하다.

12년 전에 갔을 때 1박에 7만원이었고(베르시 지역이었지만),  6년 전에 갔을 때는 에펠이 창문에서 보이는 숙소에서 3박 연박 예약에 무료 1박을 제공 받아서 1박에 17만원 정도였으니, 물가상승과 팬데믹 이후의 보상심리로 인한 수요증가를 생각하더라도, 1박에 30만원 정도면 알맞은 거 아닌가? 에펠탑이 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건물과 건물 사이로 반도 안 보이는데. 게다가 모든 객실에서 보이는 것도 아닌데!

내가 예상한 대로라면 숫자의 앞자리는 2가 아니라 1이어야 했다.


단전에서부터 열이 올라왔지만, 어쩌겠는가. 에펠이 보이는 숙소를 빠르게 포기하고 베르시 지역을 확인했다. 30만원이래도 그곳에서 묵을 예산은 없었다. 그냥 얼만지나 본 거지. 뭐 운 좋게 싼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미테랑 대학과 센 강 건너로 마주 보고있는 베르시는 시내에서 조금 거리가 있지만 지하철역이 가까워서 이동이 편하고 대학생이 많이 사는 주거 지역이라 여자 혼자 지내기도 좋은 편이었다. 줄줄이 늘어선 옛 와인창고가 식당, 박물관 등으로 개조된 베르시  빌라주에는 맛집이 넘쳐나고 와인, 생활용품 등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잘생긴 파리 청년의 공연도 심심치 않게 열리곤 했는데, 무엇보다 좋은 건 숙박비가 저렴한 거였다.

익숙한 곳이 제일이지. 생각하며 숙박 어플에 투어 에펠을 지우고  bercy를 입력했다. 스크롤 스크롤 스크롤.

와 여기도 많이 올랐네. 그래도 이게 적당한 금액이지.


풀북 풀북

풀북풀북풀북….

하아.


이번에 파리를 가게 되면, 세 번째 파리 여행이 된다.

첫 번째는 신혼 여행으로 남편과 2011년에 여행했고, 두 번째는 대학교 친구들과 2017년에 여행했는데 일정상 친구들이 나보다 이틀 후에 출국해서 이틀을 파리에 혼자 있었다. 같이 출국했어도 됐지만 조율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일정을 가져 보고 싶었다. 이틀 동안 신나게 하루에 이만보 넘게 파리 여기저기를 걸어다녔다. 겁없이 로밍도 하지 않아서 메모해둔 길이 다르거나 캡처해 둔 지도가 잘 보이지 않으면 손짓발짓을 써서 물어물어 가거나 눈만 돌리면 어디에나 있는 까페, 갤러리에 들어갔고 찾던 곳에 결국 가지 못하더라도 걸어가는 길만으로 충분한 여행이었다. 나는 이틀동안 파리를 실컷 만끽하고 있었다. 그 때 혼자 묵은 곳 역시 베르시였다. 베르시가 나를 배신할리 없어. 방을 내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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