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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밤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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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식 Jan 13. 2024

3

페리에 대신 와인이 마시고 싶었지만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은 방.


바삭하고 하얀 바게트 같은 침대에 누워 잠들지 못한 눈을 껌뻑였다.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렸더니 바스락거리는 이불에서 바게트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발끝을 더듬어 벗어놓은 슬리퍼를 찾다가 실패하고 맨발로 화장실에 다녀왔다. 카펫이 더러울 게 뻔했지만 발을 다시 씻지는 않았다.

벽에 붙은 튤립 모양의 유리 등을 옅게 켜고 가방을 뒤적여 기내에서 마시고 남은 하프보틀 와인을 꺼냈다.

3:28 a.m 하루 종일 걷고 비까지 맞고 들어와서 오늘은 깨지 않고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겨우 한 모금 남아 있는 와인으로 다시 잠들 수 있을까? 미적지근해진 와인을 입 안에 잠시 머금었다 삼키자, 달콤쌉싸름한 과실주가 흐르는 줄기를 따라 뱃속이 따끈하게 데워졌다.     

낯선 천장과 마주 누워 있으니, 여기가 베르시인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저녁부터 시작된 비가 아직도 내리는지 습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어두워진 파리의 밤거리는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여자 혼자 그것도 동양인이라면 더 그러하다. 레스토랑 안에 앉아 파스타를 포크에 돌돌 말아 먹다가 눈이 마주친 노숙자 아저씨를 떠올린다. 야외 테이블 사이를 다니며 구걸하던 아저씨는 레스토랑 직원의 제지에도 쉽게 돌아가지 않고 레스토랑 주변을 서성이다 나와 여러 차례 눈이 마주쳤다. 내 눈 속의 두려움을 보았을까? 아무도 모르게 레스토랑 창을 사이에 두고 시작한 나 혼자만의 신경전. 난 아저씨에게 호락호락 주머니를 털릴 생각이 없어요. 제발 빨리 가세요. 나 이제 집에 가고 싶다.      

다 먹은 파스타 그릇을 앞에 두고 물만 홀짝이고 있는 나에게 직원이 다가왔다.     


- 뭐 더 필요하니?

- 아니, 그냥 저 아저씨가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     


직원이 알겠다는 듯이 웃고는 돌아갔다. 직원은 나의 두려움을 이해했을까? 계산서를 들고 자리로 돌아온 것을 보면 아니었던 것 같다. 빨리 가란 거니? 와인 한 잔이 필요했지만, 맑은 정신으로 레스토랑을 나서야 할 것 같아서 탄산수를 주문하고 책을 폈다. 테이프가 빽빽하게 붙은 파리 관광안내 책자였는데 신기하게도 한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돼서 일본이 왜 그토록 우리말을 빼앗으려고 애썼는지 단박에 알 것 같았다.      

노숙자 아저씨는 애국심에 고취된 혼자 있는 작은 동양 여자를 포기했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골목에 숨어 있다가 내 뒤를 따라오지는 않을까? 두리번거리지 않는 척하며 레스토랑을 나와 재즈클럽 앞의 여유 넘치는 파리지앵들을 경보선수처럼 통과해 생 제르망데프레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낮에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는데 지구가 자전하며 해에게서 등 돌리듯 멀어진 기분이었다.     


물론 그 아저씨는 내가 안중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늦었지만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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