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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밤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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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식 Jan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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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이거 파리 시찬데?!


- 방이 없어.

- 눈을 낮춰.

- 이 정도면 바닥에 붙었거든? 12월이야. 내가 아무리 겁이 없어도 6시도 안 돼서 해지는 파리에서, 우범 지역에서 자야겠니? 혹시 나 몰래 보험 들었어?     



나는 겁이 없다.

그렇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몇 안 되는 오래된 친구들과 마주 앉아 지난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진짜 너는 겁도 없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예를 들면, 중학교 때 일진 언니들에게 불려 간 화장실에서 눈도 끔쩍하지 않았던 일이라던가, 고등학교 때 애먼 학생을 잡는 학생주임 선생님께 대거리를 한 일이라던가, 환락가가 넘쳐나는 이태원에 혼자 살 자취방을 구했을 때, 처음으로 혼자 파리에 갔을 때, 지도는 책으로 보면 된다고 로밍을 안 했을 때, 불어라고는 봉쥬, 마담, 메르시, 쥬똄므 밖에 모르면서 소수정예 불어 큐레이션 전시를 예약했을 때 등인데,


설명하자면,     


일진 언니들한테 불려 갔을 때 겁먹지 않았던 건, 뭣도 몰랐기 때문에 그 언니들이 무서운 사람들인지 몰라서였고, 학주 선생님한테 대들었을 땐 정의감 넘치던 질풍노도의 시절 간이 잠시 부었던 걸로... 환락가가 넘치는 이태원은 회사랑 가깝고 한강이 보이는 집이 그저 좋았을 뿐이고, 처음 혼자 파리에 갔던 건, 진짜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 처음에는 남편과 같이 갔었다. 둘 다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비행기 탈 때 신발 벗어야 하는 거 알지? 신발주머니 챙겨와. 발 씻어야 하니까 비누 가져오고 등의 유치한 장난을 쳤지만, 그 속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곳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정오를 조금 지나 샤르드골 공항에 내렸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보는 곳인데 이상하리만치 어떤 것도 낯설지 않았다. 그저 이 안에 내가 진짜로 서 있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고, 먹고 있고, 만지고 있단 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이곳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내 감정만이 이 많은 것 중 유일하게 낯선 것이었다. 거봐, 왜 쫀 거야? 여기도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남편한테 멋진 척하고 나니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았다.     


처음 갔던 파리에서 얻어온 건, 용기였다. 두 번째에는 혼자 파리에 갈 수 있는 용기.

내가 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적금처럼 조금씩 모은 용기가 만기가 되어 찾아 쓴 것이었을 뿐.


이틀을 새벽잠 설치며 숙소를 찾고 항공권이 취소되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기가 지난 용기를 가졌다고 안전한 숙소가 나타나거나 남편이 몰래 숨겨 뒀다가 이럴 때 짜잔하고 꺼내기를 바라지만 없는 거 아는 비자금이 생겨날 리 없지 않은가.     


오늘도 밤이 늦었다.

잠깐 꿈 같았던 파리 계획이 무산된 게 분한 건지, 속이 상한 건지, 검색만 하다 기운이 다 빠진 건지, 지난 파리 여행 사진을 보며 들떴던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는 건지, 잠이 오지 않는다. 나의 버선발은 여전히 문틀을 넘지 못하고, 자객은 실력이 형편없다.


새벽 세 시가 넘었다.

나는 가지 못한 파리 시차로 살고 있다.

마그네슘을 먹어도 수면유도제를 먹어도 해결할 수 없는 불면의 밤은, 결국 가야 끝난다.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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