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는달과별 Dec 10. 2018

눈 녹듯 사라져 버린 누나를 그리는 나의 이야기

[너에게 전하는 편지 v번외2] by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41396번째포효


* 이 글은 제가 저장하고 싶어 올리는 글입니다. 원래 글은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 2018년 12월 9일에 게재되었습니다. 저작권도 작성자가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눈이 왔었잖아. 그 날하고 비슷한 풍경이었던 것 같아. 온세상이 하얗던 날이었잖아.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서 마치 세상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던 날. 왜, 눈이 밤새 쌓이고 다음날 아침, 새들의 발자국조차 찍히지 않은 순백의 경치 안에서 우리 둘이서 손을 조용히 포개고 있었던 그 날.

숨만 쉬어도 하얀 입김이 나오는 계절에, 한창 시험 때문에 모두들 추워도 호호 손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열심히 공부하던 그 시기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항상 다람쥐길에 외로이 앉아있는 누나를 보고 왜 저렇게 앉아있을까 생각했었어.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장갑도 끼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앉아있던 누나를 보면서 춥진 않을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었거든. 그도 그럴게 누나, 정말 내 이상형에 가까웠으니까. 언젠간 찾아올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누나는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앉아있었잖아.

용기를 낼지 말 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었어.  다람쥐길의 작은 의자에 앉아있는 누나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으니까. 괜히 말을 걸었다 산산이 부서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 아니, 솔직히 내가 부서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것 같아. 나, 정말 못생겼잖아. 어딜 가나 쟤 참 못생겼다고 수군거림이 들릴 정도로, 그 정도로 못생겼으니까. 덕분에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았어. 혹시나 누나가 거절하면 어쩔까, 혹시라도 내 얼굴만 보고 판단할까 봐 두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 날 양치질을 하면서 본 거울에는 흉측하게 생긴 사람이 날 바라보고 있었어. 내 얼굴은 참 못생겼구나, 생각했지. 그래도 말을 꼭 걸어보고 싶었어. 학교를 다니면서도 동기들과는 거의 담을 쌓고 살았던 탓에, 항상 혼자 다녔었기에 사람의 온도가 더욱 그리웠었어. 혹시 추운 겨울이라서 더 따스함이 필요했던 걸까? 결국 나는 내일 누나를 본다면 말을 반드시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용기를 내야 내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다음 날, 누나는 어김없이 다람쥐길의 그 자리에 있었어. 그 날은 유난히 추운 날이었어서, 누나 손에 벙어리장갑이 끼워져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안심했었지. 오늘은 그래도 누나가 조금 덜 춥겠구나 해서 말이야.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춥지 않냐는 별 것 아닌 말이었어. 혹시나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지, 며칠 동안 누나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하느라 조금 진땀을 빼긴 했어. 그래도 누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줬고, 따뜻한 커피 한 잔 하지 않겠냐고 묻는 나의 말에도 망설임 없이 긍정의 말로 답해줬잖아.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의 어색한 말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 어리다는 티가 팍팍 나는 단어 선택과 이야기 주제 선정에도 누나는 그저 듣고 하얗게 웃어줬었지. 살면서 공부밖에 해 본 적 없는 나였어서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갔지만, 오히려 휴학생이었던 누나도 당신의 이야기를 해 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었던 것 기억나? 그 후로는 세상이 달라졌어. 누나의 번호를 받고, 누나의 목소리를 듣고, 누나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면 은은한 미소가 내 입가를 떠날 줄 몰랐어.  내가 누나에게 보자고 하면 누나는 항상 같은 미소로 날 맞이해줬고, 누나가 나에게 보자고 하면 나는 눈발이 휘날리도록 달려갔었지. 장소는 항상 다람쥐길이었어. 추울 때가 많았기에 우리는 꽤 자주 문과대학 서관에서 몸을 녹이기도 했지. 안암오거리 쪽의 포장마차에서 붕어빵을 팔길래, 누나가 생각나서 냉큼 사서 다람쥐길로 달려갔었어. 둘이 알콩달콩 붕어빵을 먹으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었던 것 기억나? 누나는 왜 다람쥐길에서 자주 보이는 거냐고. 우리가 만났던 그 날 왜 다람쥐길에 앉아있었던 거냐고. 내가 혹시 누나 다람쥐 아니냐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자 미소 짓던 누나를 보며 흰 눈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 내가 다람쥐길에서 처음 봤던 누나는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얼굴이었지만, 내 앞에서는 항상 예쁘게 웃어줬으니까.

다람쥐길의 유래에 대해서 그 날 알게 되었어. 수업 듣기 바빴던 학생들이 원래 있는 길은 사용하지 않고 산길을 이용하다 보니 그것이 정식 길로 채택되어서 생긴 길이라는 거. 나한테 물어봤잖아, '너는 나중에 어떤 길을 가고 싶냐'라고. 막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만 얼버무렸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아. 그랬던 나와는 반대로 누나는 양 볼이 발갛게 물든 채로 말했었지. 어떤 분야를 가든 그 분야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길을 닦아놓고 싶었다고 조금은 소심하게 말했었잖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사람은 정말 보고 싶은 게 많구나, 하고 말이야.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이게 흔히 말하는 썸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 요즘 사람들은 이 정도 되면 다들 사귀는 거라고 하던데 나는 하나도 감이 안 오더라고. 거의 매일같이 누나를 만났다고 해도, 누나가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어. 직접 물어보기는 너무나도 무서웠거든. 혹시나 누나가 한겨울의 눈처럼 녹아버려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 타인과 관계 맺는, 그리고 삶에 있어서의 태도를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누나는 이미 내 안에서 너무 큰 존재가 되어있었어. 내 생각의 눈발들은 누나가 불어주는 바람에 이끌려 다니기 일쑤여서, 말하는 방식부터 누나가 고민을 할 때면 깍지를 끼고 무릎에 살짝 갖다 대는 사소한 버릇까지 따라하게 됐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누나, 내가 누나에게 고백의 말을 건넨 그 날 있잖아, 누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했을 때, 누나는 '있으면 좋은데, 없으면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잖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모르게 '난 안돼요?'라고 말했을 때, 누나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어.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유치한 대사였지만, 예전에 생각해둔 대사가 없었기 때문에, 본능에 이끌린 채로 머리에 있는 말을 그대로 읊었어. 그런데 누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미안하다'라는 말이었지. 거절의 말을 듣고 나니 머리가 띵했어. 내가 여태 걱정했던 그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역시 나는 못생겨서 안 되는 건가, 누나 같은 사람은 나에겐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던 건가 하고 생각했어. 내가 누나에게 '혹시 내가 못생겨서 그런 거야?'라고 물어버렸잖아. 너무나도 급한 마음에, 억울한 마음에 그냥 되는대로 지껄였던 그 말. 다행히 누나는 나에게 '아니, 외모는 나에게 크게 상관없어.'라고 말해줬지. 하지만 그 후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어.

누나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어. 난 누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한없이 바보 같아진 나를 구제해줄 사람이 날 바라봐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누나는 나에게 잠시 다람쥐길로 나와줄 수 있냐고, 혹시 오려면 몇 분 정도 걸리냐고 물어봤어. 연락을 받자마자 얼굴을 단장하고,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고민하며 옷을 걸쳐 입고 바로 다람쥐길로 뛰어갔어.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그 자리에 누나는 없었고, 다람쥐 동상 옆에 편지만 한 통 덩그러니 놓여있었어. 편지에는 누나를 닮은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누나의 이야기가 쓰여있었지. 날 만나기 얼마 전에 레베르시신경병증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 말이야. 나에게 큰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고, 우리가 함께 있었던 시간이 정말 좋았다는 말들이 점자처럼 박혀있었어. 나를 만났을 때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었고, 나머지 한쪽 눈만 보였지만 그마저도 시력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고. 그제야 누나가 나한테 했던 말이 이해가 가더라고. 외모는 크게 상관없다고. 어차피 이제는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 외모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 말이야. 그리고 다람쥐길에 외롭게 앉아있었던 누나의 모습의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 여태 보던 세상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그 이유로, 보고싶은 것이 정말 많았던 누나에게는 세상이 얼마나 슬픔으로 가득 차 보였을까.

누나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어. 통화연결음이 몇 번 울리는 동안 너무나도 불안했어. 우려했던 것처럼 누나가 내 기억 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다시는 누나의 흰색 미소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공포였어. 그런데 다행히 누나는 전화를 받아줬지. 평소와는 다른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 누나에게 한 번만 만날 수 없겠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했어. 이대로 누나를 떠나보내긴 싫다는 말들과 함께 이런저런 말들을 했던 것 같아. 누나는 지금은 힘들고, 다음 날 만나자는 말을 했어.

다음 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쌓여있던 일요일이었어. 아침을 간단히 토스트 하나로 해결하고 누나를 만나러 나갔지. 다람쥐길에서 누나는 날 기다리고 있었어.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다른 얼굴색을 보고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생각했어. 주변은 온통 하얗게 물들어있었고, 새들의 발자국조차 찍혀있지 않은, 마치 동화 속 배경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어. 누나는 날 보고 평소처럼 '안녕?'이라는 말을 던졌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단지 누나가 좋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어. 누나는 나에게 그냥 옆에 앉아달라 말했지. 다람쥐 동상 옆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가만히 있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는데, 누나가 내 손 위에 벙어리장갑을 낀 누나 손을 올렸잖아. 그런데 재미있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더라고. 그저 누나의 온도를 느끼면서 가만히 있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고마워, 난 네 목소리가 좋았고, 행동 하나하나가 좋았고,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이 너무나도 좋았어."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고 나서 누나가 나에게 해 준 말이었어. 이 말을 누나도 날 좋아했다는 말로 생각해도 될 것 같아서, 내가 누나에게 다시 말했잖아.

"우리 사귀면 안 돼요?"

누나는 초췌한 얼굴로 잠시 날 응시하더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눈물짓는 얼굴을 보이며 떠나갔어. 그 후 누나의 번호는 사라졌고, 난 누나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어.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났어. 그렇게 좋았다면서 이렇게 자기 사정만 이야기하고 떠나버리는 게 말이 되냐고. 누나가 빛을 잃더라도 우리는 함께 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잘 못하는 술도 마셔보고, 혼자 취해서 침대에 퍼질러져서 한참을 울고불고했었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 경치, 누나도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은 이 글을 볼 수 없을 누나,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여전히 너무 보고 싶다. 지금 생각해도 난 누나가 너무 좋았는데.

한겨울의 다람쥐길에서의 이야기,

우리가 함께했던 겨울의 이야기,

눈 녹듯 사라져 버린 누나를 그리는 나의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손편지'에 담긴 진심과 추억, 그리고 성장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