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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행성 Sep 21. 2024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까?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92

이 기사에 따르면,


" 한 해에 쏟아지는 미대 졸업생은 3,000명이 넘지만(2) 이 중 전업 작가가 되는 비율은 10%를 넘기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기준 국내 미술작가는 약 4~5만 명, 수십 년 전부터 미대를 졸업한 이들 중 그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그중 작업으로 얻는 월평균 수입이 100만 원 이하인 작가가 전체의 79%에 달한다. 취업한 미대 졸업생 대다수는 미술학원 강사, 일러스트레이터, 미술관의 임시직으로 최저시급에 가까운 임금을 받는다.(3) 시간이 꽤 흘렀지만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로 살아남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


라는 대목이 있어. 참담하지?

완-전- 사실이야.

정말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스러지지.


내가 졸업한 학부의 서양화과는 3수 이상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어. 11수 한 사람까지 있었다. 대부분 장수생들은 집에서 지원받지 못하고 스스로 알바하며 입시하고 들어온 사람이 많았어.


그렇게 오래 고생하고 힘들게 들어온 학교인데, 그런 장수생들은 대부분 학교 다닐 때에도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 사실 화가가 되는 건 정말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더라고. 대학을 졸업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빠르면 30대 중후반, 늦으면 50대까지 적은 수입으로 버텨야 돼.


작업실비도 들고, 재료비도 적지 않아.

어른들이 자식 하나가 미술 하면 기둥뿌리 뽑아먹는다 했었는데, 나중에야 그 의미를 알겠더라고.



미대를 졸업한지 20년 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난 지금, 동기들을 살펴보면 10%나 남는다는 건 뻥인 것 같아. 그리고 4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같이 활동했던 작가들 중 내노라 할 만한 잘 나가는 작가가 떠오르질 않아.

50대, 60대엔 아는 사람 중에 빵- 뜬 작가들 나타나겠지? 꼭 그랬음 좋겠다.

나는 초딩 때부터 장래 희망이 '화가' 하나였어. 매일 매일 한국 미술사에 획을 긋는 위대한 작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 근데 대학 졸업하고 두 번의 개인전과 수십번의 그룹전을 지나면서 깨달았어. 난 화가가 될 수 없는 성향이라는 걸.

같이 활동하던 친구들 중에
여전히 작가로 열심히 살고 있는 친구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 중 상당수는
내일의 현실에 대해 별로 스트레스가 없어.


나는 담달에 쓸 재무 계획이 안 잡히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준비해야 하는 타입이거든. 10년간 사업하면서도 단 한번도 사무실 월세나 월급은 밀려본 적이 없어.

그런데 내 작가 친구들은,
오늘 갑자기 그림이 팔려서 100만원이 생기고
내일부터는 예정된 수입이 없어도
그 돈으로 좋은 술을 사마실 수 있어.
mbti 검사를 해보면 난 분명 P인데, 작가 친구들을 만나보면 내 자신이 대문자 J처럼 느껴져.

그리고, 이 친구들은 자기 확신이 강해.
자뻑이라고 표현해야하나?
누가 자기 그림에 대해 뭐라고 하건간에
자신의 작품들을 엄청 사랑해.

나는 그게 안 됐었거든.
다른 사람의 평가와 결과에 엄청 신경써.
첫 번째 개인전 때 완판이 됐는데
두번째 개인전 때 오는 사람들이
안 실망했으면 좋겠는 마음에
과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병에 걸렸었어.

그 때 깨달았어.
그림 그리는 손재주보다,
내일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스트레스 없음이
화가가 되기 위한 진짜 재능이고,
"난 그 재능이 없다."


미술 작가로 5-6년 활동하고 나서 얻은
자아성찰이었지.
그래서 그렇게 되고 싶었던
화가 생활을 접었어.

되게 웃긴 건.
나 대학 다닐 때 장수생 언니 오빠들이 가끔
날 보면서 너는 화가 할 얼굴이 아니래.
나중에 사업하거나 복부인 될 것 같대.
그 말 듣고 난 섭섭해서 운 적도 있었지.
그땐 누구보다 화가가 되고 싶은 열정이 컸거든.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만 있다면,
내 인생 엄청 불행해도 괜찮아-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니깐,
그땐 틀리고 지금은 맞는 그런 얘기인 거야.
결국, 그 언니 오빠들 말 100% 맞았지 ㅋ
정말 얼굴에 그런 게 있나? ㅋㅋ
가끔 거울 보면서 생각한다.

가끔, 그림을 그리던 내 모습이 떠오를 때
가수 윤종신이 생각나.
윤종신은 다작으로 유명하잖아.
매일 숨쉬듯 편안하게 노래를 만드는 사람같아.

사실 내 그림도 그래야 했어.
너무 힘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작을 해야했던 거지.
역사 속 대가들도, 평생 그린 그림들 중
고작 많아야 서너점이

불후의 명작이야.

근데 이제 막 시작한 꼬맹이가.
첫번째 개인전 때 불후의 명작을 그리려고
힘 주고 쥐어짜고 했던 걸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애잔해.
어찌보면 교만한 거고 말야.
그러니 당연히 좋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겠지.

나는 외갓집의 첫 손주였어.
내 밑으로 동생들이 무려 열 세명이나 있다?
안그래도 아기 예뻐하는 집인데
첫 아기이다보니,
온 집안 어른들이 나를 엄청 예뻐해주셨었어.
원래 첫 사랑이라는 게 있대네.

초중고등학교 때 졸업식 하면
우리집만 극성스럽게
이모 삼촌 숙모 동생들까지 막 수십명이
우르르 축하한다고 와주셔서
사춘기 땐 좀 창피하기도 했다 ㅋㅋㅋㅋ

근데 이렇게. 실제론 대단하지 않은 앤데
뭐든 잘한다 이쁘다 기대를 해주니까
고맙긴 한데
부작용으로, 나한테 기대하는 사람은
실망시키면 죽을 것 같은
그런 증상이 나한텐 아직도 있어.
그래서 그림 그릴 때도 그렇게 힘들었나봐.

지금 아이 키울때도 나같이 클까봐
좀 조심하는데. 키워보니 절제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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