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돌한 내 발언에 대표님은 좀 놀란 눈치셨어. 나중에 얘기하셨는데 안그래도 좀 브랜드 컨셉과 공간에 대해 고민이 많으셨대. 세상에 인테리어 디자인 잘 하는 회사는 많지만, 그 기업의 컨셉과 아이덴티티를 잡아주는 회사(=지금의 브랜딩 회사들)는 거의 없던 터였거든.
그래서 우린 대화를 시작했어. 그 대표님은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고민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좋으셨나봐. 하지만 나한테 사업의 명운을 가르는 브랜드 컨셉과 아이덴티티를 맡기기가 쉽지는 않으셨겠지.
나도 맡을 생각은 하지 않았어. 엄두도 안 냈지. 난 그냥 알바생일 뿐이잖아. 다만 내 생각에 이렇게 저렇게 하면 대박이 날 것이 확실한데, 그걸 말해줘도 안 하시니까 엄청 답답했어.
그도 그럴 것이 그 분은 수퍼 엘리트에 대기업 마케터 출신이셨고, 내가 하는 얘기들이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는데 실제로 그게 만들어진 사례는 없었으니까. 알바생 말만 어떻게 믿겠어.
아트라는 건 세상에 없는 걸 찾아내는 거니까. 내 입장선 왜 이미 만들어진 사례를 찾아서 따라가야 한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어. 이미 누가 어떤 컨셉 가지고 대박을 쳤다면 그건 이미 몇 년 전에 시작한 컨셉일 거고 지나간 유행 아니냐며 ㅋㅋㅋ
아. 이렇게 나의 오지랖에서 시작된, 토론 아닌 토론은 몇 달동안 계속됐다. 뭐 내 말을 인정하고 들어준다고 해서 나한테 딱히 득 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몇 달을 논쟁하고 있자니 나도 슬슬, 이건 아니지 않나 생각하게 됐어. 좀 지치더라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지금 뭐 하는 거지? 싶었어.
그래서 이제 그만 하자고 하고, 몇 년간 그림 팔고 알바팔며 모은 돈으로 여행이나 갔다 오기로 했어. 런던을 가기로 했는데, 당시에 우리가 서울에서 했던 것 처럼 런던의 젊은 작가들이 전시를 열고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해서 꼭 가보고 싶었었거든. (그게 지금 그 유명해진 프리즈야! 그들은 세계 탑이 됐는데)
그 얘기를 했더니
그 대표님이 대뜸, 런던과 파리 트렌드 학습 코스를 짜서 데리고 가주면 여비를 대시겠다는 거야. 원래 내 컨셉은 다시 아티스트로 돌아가서... 갬성을 채워보겠다 그런 거였는데.
그리고 중요한 건. 나도 런던과 파리를 잡지와 인터넷으로 배웠지 가본 적 없었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만 몇 달 간 논쟁할 때, 뉴욕 얘기 런던 얘기 많이 하면서 거기가 서울보다 트렌드 빠른데 거긴 이런 자유분방하고 빈티지한 느낌들 먹힌다!! 고 내내 주장을 펼쳤었거든... 그랬더니 한 번 직접 보고 느껴보고 싶으셨나봐.
내가 그걸 수락 했게, 안했게?
내 오지랖에... 했지. 여비 대주시는 게 컸지만 ㅎ
덕분에 내 계획보다 더 많은 곳들 곳곳까지 다 가볼 수 있었어. 파리도 좋았지만, 런던이 정말 좋더라. 배울 점도 많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감성이었어.
숙소도 넉넉치 않은 예산 안에서 나보고 마음대로 잡아보라고 하셨는데, 런던 구석의 싼 호스텔(16명씩 한 방에서 자는...)에서 대부분을 잡고,
세이브한 비용으로 필립 스탁 등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지은 호텔들로 남은 일정을 잡았어.
식사도 그런 식이었지 ㅎ 미술관과 갤러리도 많이 갔어.
다행히 그 대표님은 그 코스에서 많은 영감을 받으셨고, 디자인과 브랜드 컨셉에 대해 가지고 있던 어떤 틀들을 완전히 깨게 되는 계기가 되셨다고 고마워해주셨어. 덕분에 나도 공부 많이 했고. 그러고나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지. 그리고 그렇게 내 임무를 다 했다고 (속으론 할만큼 했다고 ㅋ) 생각했어.
그런데,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