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범대 다니면서 임용 걱정 없이
'좋은 교사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온지는 오래 되었다. 교사가 되기 한참 전부터 생각했고, 교사가 되고 나서는 생각한 것처럼 되지 못하는 내 자신에 계속 물음을 던지곤 했다. 끝없는 내적 갈등 속에서 점점 나 스스로 만족하는 교사에 조금 더 가까워져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학생이 만족하는 교사가 되야 하는 게 일반적인 것 같은데, 그것을 점점 포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수업이 끝나고 나올 때, 나의 뿌듯함이 아이들의 배움보다 더 중요해진 것을 진솔하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집중하기 보다 열심인 내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온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 '받아들임'이 좋은 교사로의 문턱을 겨우 넘어선 단계일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예 도망간 건지도 모르겠고.
대한민국 청년들의 꿈을 응원하는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누군가를 위한 삶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모험적으로 풀어내는 여정이었기에 꿈에 가까워지리라 생각했다. 실로 꿈에 가까워진 기분은 만끽했지만, 결국 나 또한 희생만 하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인정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욕심인지, 꿈인지 무엇이라 부를지 모르게 튀어나온 인정의 욕구였다. 그렇게 깨달아갔다. 이타심은 이기심을 만들어낸 다는 것을. 물론, 나의 어떤 애초의 이기심이 그때의 이타심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좋은 교사'에 대한 고민에서 나는 이타심과 이기심, 그 어느것도 택하지 못한 교육관 없는 교사인 듯 했다. 이타심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인정의 욕구로 인해 많은 것을 눈감아 버리고 포기했을 것이다. 인정의 욕구를 갖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젊은 날의 나는 더욱 단단한 나다움을 갖게 되었지만, 이제는 이타심인지, 이기심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인정 받고 싶은 것인지 어느 것도 택하기 두려운, 아니 귀찮은 나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 나도 사전적으로는 MZ에 속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내면의 나태함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내가 그 동안 해왔던 '좋은 교사'의 '좋은'은 수동적인 의미였음을 깨닫는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에너지가 희미해져갈 때 쯤이 되어서야 말이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내가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시절 즈음에 타인으로부터 인식되고 정의되는 어떤 나를 꿈 꾸었다는 것은 희생과 인정, 이타와 이기는 공존하고 보완적인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타적인 좋은 교사 말고, 이기적인 좋은 교사. 이기심을 부려본다면 나는 어떤 질문을 해야할까?
'교사 말고, 좋은 교사'를 꿈꾸었던 젊은 나는 이제 조금씩 잊고, '좋은 교사 말고, 위대한 교사'를 꿈꾸고 싶다. '선생님'이나 '스승'과 같은 단어 말고, 온전한 직업적 의미의 '교사'이면서도 위대한 사람.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위대한 교사.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CEO, 위대한 대통령 처럼 위대한 교사. 예수님이나 부처님,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 말고도. 학교에서 위대한 교사. 이제 내 질문은 '좋은 교사란 무엇일까?'가 아니고 '위대한 교사란 무엇일까?'이 되고 싶다. 답을 찾아나는 과정의 끝에는 '좋은 교사'에 대한 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닭과 계란과 같은 이타와 이기처럼.
나는 이제 '위대한 교사'를 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