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다 내버려 두고 하루 만에 귀국
19일. 도망치듯이 동티모르를 떠났다. 한국으로 가는 건 좋지만 이런 식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계약기간을 모두 마치고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동티모르를 떠나야만 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6일 오전.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수도로 대피 와서 지내야 할 상황을 대비해 필요한 짐을 싸놓으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그런 일이 생기겠어- 하는 마음이었고, 혹시 정말 갑자기 대피를 하게 된다고 해도 옷 한두 벌, 노트북, 지갑, 여권만 넣으면 되니 그 상황이 닥친 이후에 싸도 늦지 않을 테니까.
17일 정오. 수도로 대피가 아니라, 한국으로 일시 귀국하라는 메일이 왔다. 귀국 여부는 선택할 수는 없다는 말도 적혀있었다. 외교부와 코이카 본부의 결정이었다. 그 배경에는 한국 항공노선 감소에 따른 고립 가능성, 열악한 의료환경(내가 사는 지역에는 병원이 없었고, 그나마 수도에 있는 병원에서도 의심환자를 컨테이너에 격리시켰다. 그가 화장실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또한 동티모르는 코로나를 자체적으로 검사할 키트가 없어서 호주의 도움을 받고 있다), 외국인 혐오로 인한 범죄가 있었다.
꽤 길게 온 메일에 적힌 일시 귀국의 이유는 모두 사실이었다. 한국을 가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를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데 인도네시아는 한국인 입국을 곧 막는다고 했고, 동티모르 나라 자체 봉쇄 가능성도 있었고, 길을 지날 때마다 '꼬로나 꼬로나!' 하며 위협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고(남자 5명이 나를 쫓아오며 코로나라고 소리 지른 적도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외국인 격리시설 반대 시위로 경찰이 최루탄 발사 및 해산조치가 있기도 했다. 동티모르에 확진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몇 시간 뒤, 내일 이 곳을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하셨다는 메시지가 왔다.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가져가야 할 짐은 많지 않은데, 언제 동티모르에 돌아올지 알 수 없고, 혹시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 나머지 짐도 정리해두고 가야겠다 싶었다. 냉장고를 비우고, 주방 서랍도 하나하나 열어보고, 옷장과 서랍장에 있는 물건까지 한 군데로 모았다. -짐이 참 적다- 싶었다. 마치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의 짐 크기 같았다.
가져갈 물건은 작은 캐리어에 넣고, 나머지 짐은 박스에 얼기설기 넣었다. 차곡차곡 제대로 넣지 않은 것은 마지막 나의 희망이 담긴 자존심에서 기반한 행동이었다. 이 박스를 국제소포로 받을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다시 돌아와서 풀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희망에 찬 이상한 고집.
대충 짐을 정리하고 일하고 있던 학교로 다시 갔다.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다. 동료 선생님들과도 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이별은 슬프지 않았다. 가져간 필름 카메라로 학생들과 마지막(일 수도 있는) 사진을 남겼다. 학생들은 "Professora, ami hanoin ita(선생님, 보고 싶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나도 보고 싶을 거라는 대답을 했다. 사실 나는 보고 싶을 거라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더 하고 싶었다.
그깟 가나다라, 아야어여, 하나 둘 셋... 못 외운다고 소리쳐서 미안하다고. 너희의 속도는 존중하지 못하고 빨리빨리를 외쳐서 미안하다고. 여기서 책임감 갖고 봉사한다며 있을 때는 언제고 상황이 어려워지니 제 살겠다고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현지어로 이런 내 마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그랬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거짓말 치는 게 제일 나쁘다고 수십 번을 말했는데, 그중에서 내가 제일 거짓말쟁이였다.
도망치듯 급하게 떠나는 내 뒷모습을 보며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날 저녁, 동료들과 마지막(일 수도 있는) 식사를 했다. 해보고 싶었지만 못 해봤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만 날이냐, 내일도 할 수 있는데 뭐(하루 만에 한국으로 떠나게 될 거란 상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까)- 하고 미뤄뒀던 일들을 떠올렸다. 역시 뭐든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걸, 인생의 미래는 단 일분 뒤도 보장되어있지 않다는 말을 몸소 깨달았다. 세상에 너무나 만연한 격언이었는데, 역시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기 전까진 제대로 모르나 보다. 더 이상 행복한 일을 미루지 말자고, 하고 싶은 일을 미루고 살지 말자고, 미래를 보며 현재를 그냥 보내지 말자는 교훈으로 마지막(일 수도 있는) 동티모르 오에쿠시 지역에서의 하루를 마감했다.
꼭 다시 이 멤버가 그대로 모여 똑같은 메뉴를 해 먹자는 약속도 했다. 이 약속이 우리 뜻대로만 될 수 없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을 연신 삼켰다.
18일 아침. 작은 캐리어 하나를 들고 수도로 나가는 경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위에서 내려보는 마을의 모습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정든 곳을 떠난다는 건, 어쨌건 저쨌건 슬픈 일인 거야- 나를 위로했다. 옆에 앉은 동료의 눈도 슬펐다. 모른 척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았다. 그 동료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수도에 도착해 인도네시아 입국을 위한 건강검진서를 받으러 병원에 들렀다가, 하루 묵어야 할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수도에 하루 묵고 다음 날 오후 인도네시아를 경유해 한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저녁에 숙소에서 가만히 있는데, 처음 동티모르에 도착했을 때 현지어를 알려주신 선생님이 마지막 인사를 와주셨다. 현지어 수업이 끝난 지 6개월이 되어가는데 선생님은 나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이 사태를 안타까워하시며, 한국에 가서도 앞으로 건강하고 즐겁게 살라고 하셨다. "Moris mak hanesan ne'e(삶이란 그런 거야)." 동티모르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었다.
19일이 밝았다. 동티모르에 하나 있는 국제공항으로 갔다. 자이카(일본 국제협력단) 봉사단원들도 와있었다. 그들도 오늘 급하게 떠나게 된 듯했다. 미국과 뉴질랜드 단체들은 저번 주에 이미 떠난 상태였다. 이제 동티모르 땅에 외국인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거다.
떠나는 비행기 위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얼른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고, 동티모르에 코로나 확진자가 생긴다면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시간을 차근히 돌아보는데, 잠깐 꾼 꿈 같이 느껴졌다. 마치 잡을 수 없는 상상처럼, 내가 만들어낸 기억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 상상 같은 기억이 가장 남는 거고 소중한 거야.- 또다시 나를 위로했다.
나는 열악하기에 위험하고, 외국인이기에 더 위험한 곳을 떠나 도망가고 있었다. 병원이 있는 곳으로. 외국인이 아닌 곳으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멀리, 멀리, 더 멀리. 추운 겨울이 지나 찬 바람이 걷히고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