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 살인 업자 60대 여성의 인생 이야기
금요일 밤 지하철, 한 50대 후반의 남성이 여성에게 다가가 '노인 앞에 두고 모른 척 핸드폰이나 들여다본다'라고 욕을 한다. 그 여성은 본인이 임산부라 그렇다고 말하지만 펑퍼짐한 옷을 입은 탓에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 곧이어 '어른 말씀하시는 데 꼬박꼬박 말대꾸한다'는 흔하다 못해 식상한 답변이 나온다. 그리고는 '요즘 젊은 년들은 죄 결혼도 작파하고 애새끼도 안 뽑고 의무를 게을리하는 주제에 저 편할 때만 임신 타령이지.' 한다. 보다 못한 50대 초반의 여성이 자리를 대신 양보해주고 임산부에게 다가가 세상 모든 노인이 다 저런 건 아니라며 위로의 의도를 가진 말을 건넨다.
"지금 만난 게 저 사람인데! 모두 그런 건 아니라고 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임산부가 악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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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소설의 첫 부분은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강렬하다. 임산부의 대사가 강하게 박힌다. 세상이 다 악한 건 아니라고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내가 그 악한 일을 당했다면 말이다. 동시에, 확률이 아무리 0.01%인 범죄라고 해도 내가 당하면 100%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임산부의 대사와 같은 선상에 안착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니 너무 그러지 말아라'라는 말이 얼마나 위로가 안 되는 말이었단 말인가.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은 정말 임산부를 위한 위로인가, 노인 여성 자신을 위한 변명인가.
그리고 검은 잉크가 꽉꽉 메워져 있는 한 장 한 장을 사각사각 계속 넘겼다. 이 책은 왠지 꼭 읽어야 할 것만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엄마의 책장에 꽂혀있던 <파과>를 처음 봤을 때는, 도통 읽어보고 싶지가 않았다. 소설의 내용은 고사하고 제목의 뜻 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과라... 무언가 파괴되었다는 건가. 뒷면을 보니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오던 60대...'로 줄거리 설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스릴러인가.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연민을 느끼며,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라고 적혀있었다. 감동의 성장소설인 건가. 스릴러나 성장소설이나 내 취향은 아닌데.
식당 앞에서 간판을 딱 봤는데 도통 무슨 음식을 파는 곳인지 알 수 없으나 왠지 별로일 것 같은 느낌만 지나는 경우 같았다. 그런데 아차, '구병모'라는 세 글자를 발견했다. 믿고 보는 셰프라고 요즘 소문이 자자한 작가님이다. 이것은 마치, 식당을 그냥 지나려는데, 옆 가게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내 눈동자의 끝이, '미슐랭'이라는 세 글자를 포착한 것과 같은 상황인 거다. 뭔지 몰라도 일단 들어가면 실패하진 않으리.
그렇게 시작된 <파과>의 여정은 미슐랭 보증 덕에 시동을 걸었고 임산부의 대사와 함께 가속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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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의 주인공은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 온 60대 여성 '조각'이다. 한 소녀가, 당숙네 부엌으로 팔려갔다가, 뛰쳐나와 클럽 청소 일을 하다 자신을 강간하려는 미군을 살인하면서 청부 살인의 업계로 들어가 냉철하게 살게 되다, 소중한 것들이 생기고 그것을 위해 나아가는 그런 인간이다.
조각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업계에서 퇴물 취급을 받게 된다. 그리고 조각은 냉장고에 있던 복숭아를 집어 올리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 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p.225
조각과 함께 류, 강 박사, 투우라는 세 남성이 등장한다. 여기서 내가 주의 깊게 본 인물은 강 박사다.
강 박사는 주연 같기도 하고 조연 같기도 하다. 물론 주연이긴 한데, 하는 일이 크게 없다. 조각이 잠시 사랑을 느끼는 남자이며, 초반에는 조각 때문에 위험에 빠지지만 결국에는 조각이 그녀의 능력으로 구해주는 인물이다.
위험에 빠졌을 때 조각을 찾아와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울부짖고, 조각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는 인물이긴 하나, 그것은 결국 조각의 변화를 유도하고 보여주기 위한 인물 장치일 뿐, 강 박사 캐릭터 자체가 무언가를 하진 않는다.
강 박사의 캐릭터를 보며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박신혜 역할을 떠올렸다. 현빈이 게임을 발견하고 죽을 둥 살 둥 싸움을 하면서 드라마 전체 서사를 이끌어나가는데, 어떡하냐며 울기만 하는, 주인공의 예쁜 연인 캐릭터. 기존 대부분의 누아르나 영웅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보여줬던 모습들. 나약하고 감정적인 모습. 주인공이라고 하긴 하는데, 주인공의 서사를 위한 보조역할 같은 느낌. 변화와 서사 진행의 주체자가 아닌, 주인공의 변화와 서사 진행을 위한 촉매제.
다시 이쪽으로 천천히 돌아오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무 위의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데, 업자가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이쪽으로 총구를 돌리기 전에 이미 흔들림이 없는 파지 상태로 그쪽을 겨누고 있던 그녀가 먼저 방아쇠를 당긴다. -p.301
류는 조각을 청부 살인 업계에 끌어들인 인물이다. 조각이 강간하려는 미군을 찔러 죽인 걸 보고 '소질 있네'라고 말한다. 그때가 조각과 류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은 조각과 류의 사랑하는 사람이 집에서 살해를 당한다. 그때 마침 그들은 청부 살인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돈을 받고 모르는 사람을 죽이고 있었는데, 반대편에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임을 당한 거다.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그 삶 속에서, 그들은 그 일을 그만두자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반대로 이렇게 말한다.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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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의 조각은 소설에서 거침없는 액션신을 보여줬다. 60대 노인 여성에게 힘이 어디 있냐고, 퇴물이라고 하지만 조각은 그녀가 아직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란 듯이 강력한 상대들에게도 절대 기죽지 않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칼을 꽃는다. 혼자 지내는 노인이지만 시시한 것에 대고 외롭다고 하지 않는다. 그녀의 삶은 왠지 모르게 작품처럼 느껴졌다. 어린 조각의 삶 줄거리는 가슴이 아프나 전체 조각의 삶은 그런 생각을 벅벅 지워버린다.
소설 내내 조각은 어떤 것에도 감정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능력으로 해결했고 보여줬다. 현대소설이나 영화에 이런 여성 서사가 드물다는 점을 보았을 때, <파과>는 어쩌면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아직도 <파과>의 조각이 어떤 모습인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려보려 해도 그려지지 않는다. 냉철한 말솜씨, 정확한 행동 판단력, 센 힘을 가진 날렵한 노인 여성이라. 그런 캐릭터를 본 적이 있던가. 상상이나 했던 적이 있던가.
언젠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 돌봐줄 사람을 찾든 쓰레기통을 뒤지든, 너는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야 해. 단 개장수들한테는 잡히지 말고. (중략) 꼭 개라서가 아니다. 사람 한 테라고 다를 바 없지. 늙은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늙은이는 질병에 잚 옮고 또 잘 옮기고 다닌다는... 누구도 그의 무게를 대신 감당해주지 않는다는. (중략) 너를 잘 돌봐주진 못했어도 네가 그런 지경에 놓이는 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죽어서라도 마음이 불편하겠지. 그러니 언젠가 필요한 때가 되면 너는 저리로 나가. 그리고 어디로든 가. 알겠니. 살아 있는데, 처치 곤란의 폐기물로 분류되기 전에. -p.136~138
<파과>는 한 문장이 한 페이지를 거의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로 문장이 길고 묘사가 심히 세세하다. 작가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시선을 머무르게 하며 읊어주는 느낌이다. 그래서 작가의 문체에 적응하기 전 초반에는 잘 안 읽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곧 풍부한 어휘력으로 작은 점까지 놓치지 않는 작가의 묘사가 퍽 마음에 들게 될 것이다.
또한 초반에는, 청부 살인을 하는 주인공을 마음에 들어하는 내 모습이, 갈대같이 약하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는 도덕성에 죄책감을 주기도 했다. 그녀가 하는 일을 옹호하고 싶은 건 추호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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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며칠이 훌쩍 지났는데도 조각의 삶은 내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고 나를 자꾸 건드린다. 무언가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조각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