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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록 Jan 03. 2021

고통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침묵의 시선>과 신두호의 시

영화 <침묵의 시선>에는 따로 기억할 만한 대목이 있다.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정권의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씌워) 대학살에 가담했던 자경단원의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안경사로 일하는 피해자의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다. 켜켜이 쌓인 질곡과 고통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에서 고요하고도 착잡하게 교차된다. 그 장면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촬영자까지 합세하면, 세 사람 사이의 말 없는 긴장은 배가 된다. 떠듬떠듬 분절된 문장으로 살인의 국면이 재생되고, 그 사이가 침묵으로 채워질 때마다 참극의 잔향이 스크린에서 발산된다.


영화 <침묵의 시선> 중


삼자의 관점에서 딸의 사과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순간을 모면하려는 변명이었거나, 진실을 맞닥뜨리는 혼란 또는 자책감일 수 있다. 지금 곱씹어보면 아무래도 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자발적 사과라기보다는, 학살 가해자지만 이제는 다 늙어서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 안경을 맞춘다는 핑계로 서로 대면한 자리였으니. 그런 면에서 피해자의 아들이 안경사로 일한다는 점과, 하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학살자의 안경을 맞춰주는 일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다. 이 모든 후일담의 중심에는 학살의 흔적을 바라보는 오브제, '안경'이 있다.


영화 <침묵의 시선> 중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다큐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사과하는 쪽은 대개 여성이라고.


영화의 맥락에 들어맞는 감상은 아니었으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상 사태를 부정적으로 추동하는 쪽은 대체로 남성이었고 소수자 감성으로 공감하려 노력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수긍했다.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풍경은 징후와도 같은 울림으로 포착된다

더이상 호소하거나 맹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을 때

문 앞에서 증식하는 문을 보았다

유리볼에 담긴 샐러드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 미안하게 됐다

소독과 오염이 구분되지 않는 거리에서

우리의 고해를 위한 몇 개의 빈소를 마련하고서

그럴 때마다 공사 중인 화장실을 찾아다녔지

실례지만, 화장실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러나...

각자의 의도를 지닌 손가락을 분류하여

의도에 반하는 움직임들을 수집하고 싶었다

너와 무관하게 소화되는 과일들

눈을 깜빡일 때 고려하는 빛의 요소

온순한 바퀴가 겪는 지면의 굴곡

심박수를 결정하는 사태들에 대해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진 않겠지만

문을 열고 문을 열고 그 안의 문을 밀면서

방울로 떨어지는 물은 멈출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녹슨 거울이 이끼로 뒤덮이기까지

목관악기를 채우는 지문처럼

세공할 소리의 조각을 남겨두었던가

먼저 눈을 감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다툼에서

우리는 서로의 충혈된 눈을 감겨주었다

째깍거리는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

창백한 손목들에 귀를 가져다 대면서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면서

고백했다 몇번의 비명과 함께 날이 밝아오고

구겨진 신발들이 구석에서 벗어나게 되면

물이 멎듯 고요해질 선언들로 남아


_신두호,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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