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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록 Nov 21. 2020

노동과 예술을 살아내는 일

<패터슨>과 진은영의 시

<패터슨>(2016), 감독 짐 자무쉬


<패터슨>이란 영화에는, (이 자리에 어떤 형용사를 넣어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비워 두기로 한다) 노동자-예술가 또는 예술가-노동자 커플이 등장한다. 한 명을 시를 쓰고, 한 명은 그림과 음악과 공예를 한다. 노동이 앞설지 예술이 앞설지 그런 순서의 문제 따위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인상 깊었던 건, 삶의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예술을 살아낸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특별했던 건, 노동한답시고, 예술한답시고, 서로에게 자신에게 각자의 삶에 부박하게 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저 노동을, 예술을, 일상을 살아내는 것. 어떤 수사도 화려함도 필요 없이. 난해하기로 유명한 어느 철학책 제목처럼 수없이 반복하며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일. 노동과 예술과 공감과 소통이 삶이란 이름으로 한데 어우러지는 풍경.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성이 나를 휘감은 건지도 모르겠다. <서칭 포 슈가맨>이란 다큐영화를 볼 때도 느낀 감정이었다. 나는 그러고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밝힌다.


<패터슨>의 한 장면




「멸치의 아이러니」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고집을 꺾으려고

어머니는 도시락 가득 고추장멸치볶음을 싸주셨다

그것은 밥과 몇 개의 유순한 계란말이 사이에 칸으로 막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항상 흩어져 있다     


시인의 순결한 양식

그 흰 쌀밥에서 나는 숭고한 몸집으로 붉은 멸치를 하나하나 골라내곤 했다

시민의 순결한 양식

그 붉은 쌀밥에서 나는 결연한 젓가락질로 하얘진 멸치를 골라내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 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 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는 멸치를 먹었다

멸치가 싫다, 기분상으로, 구조적으로

그것은 작고 비리고 문득, 반짝이지만 결코 폼 잡을 수 없는 것     


왜 멸치는 숭고한 맛이 아닌가

왜 멸치볶음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가

이론상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반찬 칸을 뛰어넘어 언제나 내 밥알을 물들이는가

왜 흔들리면서 뒤섞이는가     


총체적으로 폼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머나먼 폼

왜 이토록 숭고한 생선인가, 숭고한 젓가락질의 미학을 넘어서 숭고한가

멸치여, 그대여, 아예 도시락 뚜껑을 넘어 흩어져 준다면,

밥알과 함께 쏟아져만 준다면

그 신비의 알리바이로 나는 영원토록 굶을 수 있었겠네     


두 눈 속에 갇힌 사시斜視의 맑은 눈빛으로

다른 쪽의 눈동자를 그립게 흘겨보는 고독한 천사처럼    

 

_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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