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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현재 Mar 12. 2020

문학적 감수성

'느낌'과 '위험'의 세계로의 도약

  가끔 자신도 학창시절 문학소년(소녀)였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참 당황스럽다. 직업이 국어교사니 당연히 내가 학창시절에 문학 소년이었을 것이라고 넘겨짚는 것도 당황스럽지만, 도대체 문학소년이 어떤 소년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국어는 나와 지독한 원수 관계였기에 문학소년은 나와 너무나 먼 존재였다. 당시 학교가 끝나면 새벽 1시까지 농구장에 있던 것이 일과였던 나는 문학소년이라기 보다는 체육소년에 가까웠다. 그리고 사실 책을 좋아하는 그런 친구들을 시시한 놈들로 폄하했었다. 이유는 단지 그들이 운동을 잘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편협한 생각이지만, 농구를 잘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던 당시 열다섯 살의 중학생 남자아이에게 그러한 인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문학을 진지하게 접했던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이다. 물론 살아있는 작품을 마구 난도질해 부분부분 실어 놓은 문제집 속의 문학들을 접하긴 했지만, 그것은 문제를 풀기 위해 주제를 요약하고, 특징을 파악하는 기계적 읽기였지, 진정한 문학과의 만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삶의 경험이 쌓이고, 우연한 계기로 몇 권의 책을 읽게 되면서 점차 문학이 주는 삶의 통찰과 깊은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게 되었다. 


  추측건대 문학소년(녀)는 학창시절 문학을 좋아했던 소년(녀)인 것은 같은데, 사실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간다. 그 나이에는 문학작품을 읽고 삶의 진실에 깊이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짜리 아이가 사랑의 좌절을 담은 소설을 읽고 과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줄거리는 요약할 수 있겠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그 삶의 진실과 마음속 깊이 공명할 수 있을까. 연애 소설 몇 편 읽었다고 이제 사랑에 대해서 좀 알겠다고 하는 중학생의 말을 과연 믿어야 할까. 때때로 문학을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부터 가르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것들과 달리 문학은 삶의 경험이 어느 정도는 뒷받침되어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본인들이 문학소년(녀)이었다고 하니, 굳이 그것을 꼬집어내고 싶진 않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문학소년(녀)이라고 밝히면서 풍기는 ‘그래서 나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요’라는 아우라는 나를 곰곰이 생각하도록 했다. 과연 문학적 감수성이란게 뭘 의미하는 걸까. 문학적 감수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살면서 전혀 배운 바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막연한 느낌은 있다. 문학이 어떨 때 쓰여 지고, 어떤 동기에서 쓰여 지는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지어보면 그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를 쓰게 되는 때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언어적 한계를 처절하게 인식했을 때인 것 같다. 우리는 언어가 세계를 정확하게 담고, 포착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현대 언어학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듯이 명백한 착각이다. 언어는 절대 세계를 담는 그릇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반대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언어라는 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만큼만 세계를 담을 수 있다. 세계는 사실 무한하며, 서로 연결되어있다.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분절해서 인식한다. 가령 무지개를 7가지 색깔로 구별해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갓 태어난 아이에게 무지개는 어떻게 보일까. 하늘 그 자체로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무지개는 7가지 색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빛의 스펙트럼이기 때문에 그 숫자는 무한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래서 무지개를 7가지 색깔로 표현하면, 그 외의 모든 색깔들은 그 표현에서 미끄러지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무한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매 순간 변화한다. 가령 오늘 본 벚꽃은 어제의 벚꽃과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벚꽃’이라는 언어를 동일하게 사용해 마치 두 존재가 같은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두 존재 자체가 다름은 물론이고 각자가 내게 준 느낌 또한 사뭇 다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두 벚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셈이다. 어제 본 벚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았다는 의미가 덧붙여져 있을 수도 있고, 쨍쨍한 햇볕 덕분에 더 싱그러웠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묘한 의미들은 언어화 되지 못한 채 ‘벚꽃’이라는 너무 거칠고 투박한 언어 속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느낌과 의미들은 언어화 되지 못했을 뿐, 분명히 실재 했던 것들이며 단순히 ‘벚꽃’이라는 단어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시인이 시를 쓰게 되는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문학적 감수성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분명 어떤 구별되는 생각과 감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단순히 기존의 언어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도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보석을 세공하는 장인처럼 좀 더 정밀한 언어를 찾고자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새로운 언어형식을 만들어내고자 시도할 것이다. 가령 시인이 어떤 한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할 때, 시인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왜냐하면 그 전에 이미 다른 여인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했는데, 지금의 이 감정은 그것과 비슷하긴 하지만 다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둘을 구별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수사법들이 나오는 것이다. 저번 사랑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랑’이었다면, 지금의 사랑은 ‘좀 더 묵직하면서도 내 존재를 기대게 만들고 그에 따라 내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폼롤러같은 사랑’이라고 말이다. 비유는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다른 것과 지금 이것의 느낌을 구별하기 위해서 말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문학교육의 방향도 이에 따라 뒤바뀌어야 한다. 수사법을 가르치고 이를 활용해서 표현해보라는 식의 기존의 교육은 문학의 본질에 가닿지 못한다. 이런 기술적인 부분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그 모호함과 불안정 속에 던져두고, 그것을 견뎌내도록 함과 동시에 그것을 해소시키기 위해 적합한 표현을 찾아내도록 혹은 창조해 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수사법들이 활용될 수 있음을 지도해야한다. 


  이러한 미묘함과 모호함 속에서 탈출하기 위한 시도로 시가 쓰여 진다면, 문학적 감수성은 ‘단독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단독성이란, 다른 그 무엇과도 대체불가능한 어떤 고유한 특성을 의미한다. 즉 지금 내가 여기서 느끼는 이 감정을 단독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적 감수성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어제의 벚꽃과 오늘의 벚꽃을 동일한 ‘벚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문학적 감수성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단독적인 존재를 단독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인 것이다.


  이를 조금 범박하게 정리하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는 ‘사실’의 세계와 조응하고, 문학 언어는 ‘느낌’의 세계와 조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곳에 살면서 배운 언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를 ‘그냥’ 배운다고 한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그저 저렇게 생긴 게 ‘사과’라고 배운다. 여기에 어떤 필연적인 근거는 없다. 그저 엄마 손에 쥐어진 과자를 보며 ‘사과’라고 따라 말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언어를 ‘그냥’ 배운다. 문제는 앞에서도 이미 얘기했지만, 그렇게 ‘그냥’ 배운 일상의 언어들은 매우 투박하고 거칠다는 점이다. 가령 ‘사과’라는 너무 단순한 단어마저도 실재하는 사과를 담지 못한다. ‘사과’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조금 노란빛이 도는 사과를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새빨간 사과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느낌’의 세계를 다루는 문학 언어는 ‘배운 대로’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가을방학’이라는 가수의 노래 중 ‘가을겨울봄여름’이라는 노래가 있다. ‘가을방학’이라는 이름 자체에서부터도 느껴지듯 매우 문학적인 표현을 즐겨하는 뮤지션인데 ‘가을겨울봄여름’이라는 표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계절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배운다. 앞에서 말했듯이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인간들 사이의 약속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 실제 그것이 지시하고자 하는 세계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사실 ‘나의 느낌’의 세계에서 사계절을 바라볼 때 정말 ‘봄여름가을겨울’은 터무니없고 황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가을’에 태어났으니까. 내게 계절은 ‘가을겨울봄여름’이지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니다. 이를 모든 존재들에게 확장시켜보면, 각자의 존재들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 해도 각자만의 일 년을 사는 것이다. ‘꽃들도 새들도 다들 자기만의 일 년을 사는 것. 민들레의 봄은 종달새의 겨울인 것을’ 이라는 위 노래의 표현에서 ‘가을방학’만의 단독적인 인식이 드러난다. ‘배운 대로’가 아니라, 느낌의 주체인 ‘나’를 기준으로 세계를 단독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한 것이다.


  이제까지 문학적 감수성이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개성적인 발상과 표현으로 이어지고 시가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내용은 그러한 모든 단독적 표현의 동기이다. 즉, 왜 그렇게까지 피곤하고 힘든 작업을 애써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일상생활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문학적 감수성이 없는 것이 편리하다. 내게 밀려드는 이 세계를 매번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번 애인과의 감정도 ‘사랑’, 이번 애인과의 감정도 ‘사랑’으로 정리하는 것이 편하지, 그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든 구별하고 표현하려는 것은 무척이나 에너지 소모가 많은 작업이다. 혹자는 사랑은 인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니 그런 수고를 기꺼이 감당해야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 점을 나도 깊이 공감하기에 다른 예를 들어야할 것 같다. 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사랑과 같은 심각한 사건뿐만 아니라, 길을 걸어가는 단순하고도 지극히 사소한 사건에서도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세계를 단독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길을 걸어가면서 부는 바람들도 그저 ‘바람’으로 인식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방금 전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을 다르게 인식한다. 또한 그 사람은 내 앞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군중들’이 아니라 한 명 한 명 그들의 표정 속 고유한 내면세계를 읽어낸다. 과연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한 시간이면 아마 모든 에너지가 소모되고 탈진상태에 이를 것이다. 이로 볼 때, 어쩌면 문학적 감수성은 애초에 우리 모두 갖고 있는 것이었지만, 일상세계를 살아가면서 애써 죽여 온 능력이 아닐까. 갓난아이의 눈에 담긴 세계는 무한히 단독적인 세계가 아니었을까. 점점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매 순간 생명이 넘치고 약동하는 단독적인 세계를 일정하고 권태로운 세계로 만드는 것을 의미 하는 게 아닐까.


  시인들을 포함해 예술가들은 이러한 권태로운 세계로 만드는 작업을 뒤집어 갓난아이의 눈에 비친 단독적인 세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수고로운 그 복원 작업의 원동력은 어쩌면 애정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애정의 강도만큼 우리는 그 수고로운 작업을 해내고자 할 것이다. 


“내 생활은 단조로워.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닭들은 모두 비슷하고 사람들도 모두 비슷비슷해. 그래서 난 좀 지루해. 
그렇지만 만약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환히 밝아질 거야. 
그렇게 되면 난 네 발걸음 소리와 다른 발자국 소리를 구별하게 될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는 나를 땅 밑으로 숨게 할 테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 <어린왕자>, 생텍쥐페리


  너무나 많이 인용되어 참신함이 떨어질까 심히 우려되지만, 이것만큼 단독성과 사랑을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길들인다’는 표현의 의미는 애정을 가지고 관계한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듬뿍 담아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길들여지는 강아지에게 길들여짐이 곧 사랑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애정의 대상이 되면 그 대상은 단독적으로 다른 존재들과 구별된다. 위에서 다른 모든 발자국 소리와 너의 발자국 소리가 구별되는 것처럼. 만약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내 발자국 소리가 어떻게 다른데?”라고 물어봤다면 여우는 아마 적절한 표현을 창조해내려고 애쓰는 시인처럼 머리를 싸매고 그것을 표현해내려고 했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존재가 내게 애정의 대상이 되는 순간 대체 불가능한 단독적인 대상으로 떠오르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한다. 비슷한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나만을 지시하는 표현을 찾아내라고 말이다. 김춘수도 그래서 <꽃>에서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찾아 불러달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안의 문학적 감수성이 다시 한 번 살아나는 순간은 역시 사랑할 때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고유한 그 느낌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강력하게 그것을 표현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연애편지를 쓰는 사람은 시인이 된다. 자신의 온 몸에서 살아 움직이는 온갖 느낌들을 어떻게든 포착해서 표현해야만 하니까.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문학적 감수성이란 세계를 단독적으로 인식하는 감성을 의미하고, 이를 어떻게든 구별해 표현해내고자 하는 사람이 곧 시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독적 인식과 표현의 원동력은 곧 사랑이다. 훌륭한 시인이 못 되기에 이처럼 장황하게 풀어 놓았지만, 시인의 감성으로 이것을 멋지게 함축한다면 단 세 줄이면 된다. 이성복 시인의 아포리즘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정’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 삶과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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