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정치학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것과 보여 진다는 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치 상황에서 서로 눈을 피하지 않는 동물들을 상상해봅시다. 이들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은 곧 적의 사냥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눈을 피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곳 죽음이기 때문이죠. 로드킬이 일어나는 이유도 단순합니다. 달려오는 자동차의 라이트를 동물들은 적의 눈으로 인식합니다.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굴종을 모르기에 피하지 않고 대치합니다. 그렇게 동물들은 화물차에 치여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가 슬퍼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굴종 대신 죽음을 택하는 이 동물들의 강인함에 존경심이 일어나기까지 합니다.
인간도 동물인지라 이런 측면을 분명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싸우는 행태를 한 번 살펴봅시다. 무작정 주먹부터 나가지 않습니다. 먼저 서로 노려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동일하죠. 그렇게 시작된 눈싸움이 끝나는 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한 쪽이 눈을 피하거나 내리 까는 경우. 이것은 스스로 꼬리를 내리는 행위로 이제 약자의 처지에 내 몰리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 대개 싸움은 종식됩니다. 계속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몇 마디 모욕적인 말을 남기며 전쟁을 마무리합니다. 두 번째 경우는 서로 계속 대치하는 경우입니다. 이때 두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더 강자라는 것을 온몸으로 특히 '눈'으로 주장하는 셈입니다. 이 때 주먹이 날라갑니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세다고 주장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죠.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이 자식이 굴복하지 않고 감히 덤비는 모습이 자존심을 건드리나 봅니다. 그래서 내가 더 세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 주먹감자를 날립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경우 중 보통 후자의 경우, 즉 서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폭력을 쓸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잘 생각해 봐야합니다. 동물들의 세계에선 첫 번째 경우가 비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잡아먹힐지언정 강자에게 스스로 복종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무리 약한 토끼라도 사자에게 잡아먹힐지언정 최선을 다해 도망가지, 스스로 사자에 복종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이런 토끼를 본적은 없을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사자님에게 언젠간 잡아 먹힐거야. 그러니 힘 빼지 말고 순서를 정해서 잡아먹히자’ 사자 또한 자신보다 약한 동물들을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배가 고플 때 뛰어가서 잡아먹는 것이지, 명령자의 위치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 특이한 동물같습니다. 스스로 약자를 자처해 스스로 강자의 지배 속으로 걸어 들어가니까요. 또 누군가의 위에서 그를 지배하고 군림하려고 하니까요. 어쩌면 현대사회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우리 강인한 전사들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비굴한 삶을 사느니 죽음을 선택했던 수많은 전사들이 떠오릅니다. 성삼문의 경우 주리가 틀어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전하라고 한 번만 부르면 살려주겠다는 세조의 말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눈'을 맞추고 ‘수양대군 나으리’라고 부르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너무 나약하게 길들여진 존재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인의 말에 꼬리를 살랑거리며 먹이를 받아먹고, 거기서 편안함을 느끼는 개처럼 말입니다.
이로써 ‘보는 자는 강자, 보여 지는 자는 약자’라는 도식을 거칠게나마 수긍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신하들은 왕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항상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하는 모습을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왕이 자신을 어떻게 해도 좋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즉, 목을 쳐도 가만히 있겠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는 겁니다. 실제로 왕은 신하의 목을 그 자리에서 칠 수 있었죠. 그 때에도 신하는 끝까지 왕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귀신이 된 후에나 볼 수 있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야만적인 모습이라고 혀를 내두를지도 모르지만 , 현대사회도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시선이 갖는 정치적 함의는 우리 시대에도 통용되니까요. 교실에서 학생들과 선생님의 관계를 살펴볼까요. 모든 교실 앞에는 교단이 있어서 선생님은 위에서 학생들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왕이 저 위에서 밑의 신하들을 보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교실의 구조는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벽이나 구조물 없이 훤히 뚤린 정사각형 모양의 교실에서 선생님은 딴 짓하는 학생들을 골라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 볼 때는 이러한 힘의 관계가 더욱 강화됩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신하가 됩니다. 시험시간에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본다는 것은 불온한 행위가 되죠. 심지어 뒤에 선생님이 한 분 더 계셔서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선생님의 시선에서 검열합니다. 그래서 연필이 책상 밑으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죄책감이 듭니다. 마치 컨닝을 시도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늑대같은 선생님의 시선 아래서 학생들은 순한 양처럼 길들여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의 모습에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여성은 거울속의 자신을 볼 때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항상 남성의 시선에서 자신을 평가하고 검열합니다.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지만, 그것은 내 스스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특히 남성의 시선으로 고치는 것이 되는 셈이죠. 우리 머릿속에도 우리를 바라보는 또다른 '눈'이 있는 것입니다. 재밌지 않습니까. 우리사회에서 보여지는 자가 누구일까요. 여성입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꾸미고 화장을 하는거죠. 보여지는 자는 약자이고, 항상 강자의 시선을 의식하니까요. 어쩌면 반대로 얘기해도 될 것 같네요. 약자기 때문에 보여지는 존재가 되고 그에 따라 스스로를 꾸미게 된다고 말입니다. 물론 요즘은 남자들도 화장을 하고 꾸민다고 하는데, 그만큼 남성들도 약해졌다고 볼 수 있겠죠. 과거 마초 같았던 남성들이 사실 요즘 잘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꾸밈과 가면은 약자의 슬픈 생존 전략입니다. 선배 앞에서, 교수님 앞에서, 사장 앞에서 시어머니 앞에서 우리는 꾸며야하고 가면을 써야 합니다. 쓰레기 같은 사람일지라도 존경하는 듯한 눈빛과 표정을 지어야만 하죠. 사장이 종이컵에 가래침을 뱉어 주어도 노동자는 웃으면서 받아 마셔야 합니다. 그들의 '눈'에 예쁘고 착하게 ‘보여야’ 하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항상 보여지는 존재로 스스로를 꾸미며 살아갑니다. 한 번도 내 맨얼굴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맨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생계의 위협과 나의 파괴를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오늘도 내 맨얼굴은 두꺼운 화장 아래서 썩어갑니다. 이렇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게 되면, 내 맨얼굴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내 욕망을 죽이는 데에 익숙해지면, 내 욕망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른 채 시체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