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읽는 다는 것
'졸립다던 너의 혼잣말을 외롭다로 잘못 알아듣던 내 귀는 평소에도 헛것을 종종 듣곤 해‘. ’가을 방학‘의 노래 ’헛것‘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잘못 들었다‘가 아니라, ’헛것‘이라고 표현하니까 뭔가 청각에 장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헛것‘을 듣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현대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은 우리가 소리를 ’대충‘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음파를 머릿속으로 분석해서 미세한 차이까지 지각하며 구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그물코에 물고기들이 얻어 걸리듯이 대강 듣습니다.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똑같이 발음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 두 소리를 ’사랑‘으로 듣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음성을 정밀한 기계로 분석해 보면 어떨까요. 큰 차이는 아니겠지만, 분명 다를 겁니다. 심지어 동일한 사람이 같은 단어를 두 번 얘기했을 때마저도 그 두 소리는 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미세한 차이는 ’대충‘ 무시 하고 같은 단어로 듣습니다. 언어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음운체계‘라는 그물에 ’음성‘이라는 물고기들을 걸리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다 헛것을 듣는 셈입니다.
또한 우리는 음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관념, 가치관 등으로 구성된 내면에 투과시켜 인식합니다. 이것은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말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상태, 가치관, 관심사와 같은 내면에 따라 선택적으로 세계를 왜곡해서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것을 많이 느낍니다. 똑같은 기사를 보고서도 서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많이 다릅니다.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했다는 기사를 봤을 때,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있는 친구는 여전히 남아있는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폭력에 집중합니다. 반면 조직 내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민주적인 문화를 조성하는데 관심을 갖는 친구는 비대칭적인 권력구조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과거 여성에게 배신당한 경험을 가진 친구는 교수가 가진 권력에 기생하려다 실패해서 복수심에 뒤집어씌운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합니다. 물론 이것은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관점에 따라 세계를 구성해서 보니까요.
지금 중요한 것은 듣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문학시간에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개념을 배운 적이 있을 겁니다. 사실 이것은 창작이론에서 의미가 있는 개념인데, 우리는 시를 분석할 때 사용했었죠.(우리나라 문학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객관적 상관물이란 화자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주는 사물을 의미합니다. 즉, 화자가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면 문학적 감동이 떨어지기 때문에 화자의 감정을 잘 대변해주거나, 화자의 감정을 부각시켜줄 수 있는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죠. 답답하고 속상한 주인공이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장면보다, 말없이 끊었던 담배를 꺼내들어 불을 붙이는 장면이 더 우리를 울리는 것은 바로 ‘담배’라는 객관적 상관물 때문입니다.
세계는 화자나 주인공의 심정에 따라 완전히 달리 이해됩니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어제 이별한 사람에게는 슬프게 우는 것으로 들릴 것입니다. 반면 똑같은 산새들이지만, 오늘 첫 데이트를 하러 가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들릴까요. 자신들의 사랑을 축복해주는 노래로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화자는 ‘산새들이 슬프게 운다.’라고 표현할 것이고, 뒤의 화자는 ‘산새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부른다.’고 표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산새들은 객관적 상관물이 됩니다. 이 객관적 상관물의 개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투과시켜 듣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물론 산새에게 물어볼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모두 그렇게 세계를 듣고 있는데 말이죠.
이처럼 우리는 정교하지 않은 그물코로 음성을 포착해 ‘대강’ 들으며 가끔 잘못듣기도 하며, 우리의 감정을 투과해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아무 문제없이 의사소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왜일까요. 메리비안이라는 사람은 우리가 의미를 전달할 때, 언어는 7%밖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서로 의미를 주고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얘기니까요. 메리비안은 나머지 93%는 말의 크기, 어조, 분위기와 같은 준언어적인 표현 그리고 표정, 몸짓, 손짓과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에서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외국에 가서도 왜 의사소통이 되는지, 개는 어떻게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지와 같은 문제들을 설명해 줍니다. 외국사람이 우리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우리 음성의 분위기, 어조 그리고 표정, 제스처 때문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리와, 앉아’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느껴지는 말의 분위기와 표정을 읽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데, 즉 듣는데 크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언어 외적인 것들이 충분히 그것을 보완해주니까요. 그렇다면 의사소통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는, 즉 잘 듣는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 언어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준언어적인 표현, 비언어적인 표현을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상대방을 읽는 것을 의미할 겁니다. 말로는 ‘맛있다’고 하지만, 그 말에 얹어지는 음성의 분위기가 침울하다면, 그리고 표정이 부자연스럽고 씹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미련 곰팅이가 아니라면 ‘맛없다’로 읽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 그 사람을 잘 읽는 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발화한 말을 번역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여,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그것’을 잡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정확히는 온몸을 기울여 듣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사람을 읽는다는 것은 꽤나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충 듣거나, 안 들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니까요. 친구가 축 처진 어깨와 울적한 음성으로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 우리는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쉽니다. 오늘은 또 어떤 무거운 짐을 꺼내놓으려고 저럴까 싶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나 또한 너무 지쳐 들을 힘이 없는 경우, 그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친구를 많이 사랑하기에 우리는 또 각오를 다지며 ‘무슨 일인데?’라고 묻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금방금방 읽으니까요. 조금만 표정이 안 좋아도 바로 알아채죠.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관찰하니까요. 그렇다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가 되겠습니다. 얼마만큼 그 사람에게 애정이 있고 관심이 있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아무리 듣기 능력이 뛰어나도 들으려는 마음 자체가 없으면 들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무언가에 귀를 갖다 대는 것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관심을 갖는 것이 됩니다.
슬프게도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관심이 많았던 내가 점점 한두 가지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 기울이는 대상도 현격히 줄어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대적인 에너지양이 점점 줄어드는 것 때문이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 수도 있겠지만 씁쓸한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관계도 점점 협소해져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들으려는 사람은 손에 꼽죠.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도처에 널브러져 있지만, 관심을 갖는 것은 몇 개 안되죠.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것들을 안보고 안 들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너무 힘드니까요. 그렇게 점점 나도 내가 혐오했던 어른들처럼 '나'만 아는 이기적이고 협소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