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ENET 속의 장소 보물찾기
2017년 교환학생을 했을 때는 내가 다시 유럽에 장기간 체류할지 몰랐기 때문에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줄기차게 여행을 다녔다. 한국에서 흔히 '발트 3국'이라고 이야기하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중 앞의 두 나라도 이때 방문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에스토니아만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었다. 아마 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언젠가는 다시 북유럽에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에스토니아를 다시 보기 위해서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긴 휴가를 가지지 않고 여름 내내 논문 작업에 매진하면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자 스톡홀름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인 탈린에 다녀왔다 (필자는 뱃멀미가 심해서 안타깝게도 페리를 타고 헬싱키나 탈린을 가는 것이 어렵다).
에스토니아를 이렇게 버킷리스트에 남겨 놓은 사이, 내가 탈린에 가고 싶은 이유는 하나 늘어났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TENET'에 탈린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영화 인셉션에 나오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즐거워했던 것처럼, 고속도로 추격 장면을 찍은 장소를 버스나 전차를 타고서라도 지나가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주말 탈린 여행을 계획했다.
알고 보니 탈린에서 찾아볼 수 있는 Tenet의 흔적은 고속도로 추격신의 장소 이상이었다. 영화 상에서는 우크라이나, 노르웨이, 덴마크 등으로 나왔던 장소들이 알고 보니 탈린 곳곳에 있었다. 원래 탈린 여행의 목적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시가지를 둘러보고 그냥 여유롭게 주말을 보내는 것이었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이른바 '테넷 순례'가 두 번째 목표로 추가되었다. 다행히도 탈린에 도착한 금요일 빼고는 비가 오지 않고 날이 좋아서 내가 가고 싶었던 곳 대부분을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기는 테넷 촬영 장소 보물 찾기를 중심으로 한 편을 쓰고, 탈린 구시가지 감상과 소소한 여행 팁에 관해 한 편을 쓰려고 한다. 브런치나 다른 블로그에 이미 수많은 탈린 여행기가 나와 있지만, 이상하게도 탈린에 다녀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골수팬은 적었던 모양이다. 만약 그런 글을 미리 읽었다면, 처음 여행 계획 단계에서부터 동선을 더 효율적으로 짜지 않았을까 싶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영화 초반에 우크라이나 오페라 극장으로 나오는 건물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이 임무에 투입되는 장면에서 건물의 정면 모습이 나오고, 이후에는 주로 건물 안쪽의 모습이 나온다. 처음에 이 장소를 찾아갔을 때에는 같은 건물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이 시청 건물은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을 기념해서 지어진 것인데, 구소련 점령기에 지어진 몇몇 건물처럼,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이후에는 따로 관리하지 않고 사실상 버려진 건물이 되었다. 구글 검색을 보면 예전에는 건물 내부 출입이 허용되었던 것 같은데,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입구는 완전히 봉쇄되었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도 한 군데만 열어놨었다. 나중에 영화 속에서 다시 확인해 보니 보기 싫은 그라피티는 CG로 손을 본 것 같다. 좀 더 잘 관리했으면 웅장한 맛에 좀 더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을 텐데,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탈린 항구와 시내를 살펴보는 일종의 전망대로서만 간신히 기능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영화에서 주인공과 닐이 부자들이 미술품 밀수를 돕는 공간이자, 인버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기도 한 프리포트 장면을 촬영했던 에스토니아 국립 미술관이었다. 다른 글에서 설명하겠지만, 에스토니아의 박물관들은 전반적으로 좀 실망스러웠는데, KUMU 만큼은 영화 내용과 관계없이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방문을 추천하는 곳이다. 영화에서는 미술관의 독특한 전경과 더불어 두 개의 입구와 매표소 주변이 모두 잡히는데, 역시 최소한의 CG로 해당 장소가 미술관임은 감추었지만, 결국 프리포트가 미술품과 관련이 있는 공간임을 감안할 때, 이곳을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람을 할 때는, 이곳이 테넷에 나온 곳임을 인지한 다른 관광객들이 나와 비슷한 앵글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만족스럽게 사진을 몇 장 건진 다음에 거의 2시간에 걸쳐서 내부 전시물도 모두 보고 나왔다.
세 번째 장소는 KUMU와 매우 가까운 곳이었는데, 주인공이 사토르 일행과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는 고속도로 장면을 찍은 Laagna 도로였다. KUMU의 후문에 해당하는 곳을 나오면 이 도로를 지나가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내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영화에서 이 다리 자체는 등장하지 않고, 도로의 다른 부분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도로의 다른 부분을 어떻게 짧은 시간에 둘러볼지 고민하던 중, 내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탈 수 있음을 발견했고, 67번 버스를 타고 간접적으로나마 영화 속 장면에 들어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버스가 만원이라서 버스 안에서 바깥 사진을 찍지는 못했고, KUMU에서 가까운 지점에서 도로 전경을 찍었다.
네 번째 장소는 Laagna 도로에서 67번 버스를 탄 후 10분 정도 시내 쪽으로 들어간 후, 10분을 걸어서 도착한 곳으로 영화에서 주인공이 풍차에서 나온 후 테넷의 힌트가 인버전과 연관되어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는 연구소의 전경으로 나온 건물이다. 이 건물 역시 현재는 사실상 버려진 건물이기 때문에 별다른 이름은 없지만, 위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니 건물 외관은 살펴볼 수 있었다. 별다른 표시는 없었고, 역시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영화에 나온 각도와 비슷하게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외에도 닐과 주인공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도심 곳곳의 모습이 나왔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빨간 트램은 3번 혹은 4번 트램인데, 영화에서는 번호가 잘 나오지 않아서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주인공들이 전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도 아마 실제로 운행하는 전차와 동일한 모델에서 촬영한 것 같았다. 그 외에도 탈린의 구시가지가 보이는 장면이나, 탈린의 항구 쪽이 보이는 장면도 영화에 들어갔지만, 별다른 장비 없이 같은 앵글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어서 그냥 눈으로만 담아두었다.
실제 영화에서 '탈린'으로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지만, 노르웨이, 우크라이나, 덴마크로 나온 다른 장소들도 탈린에서 촬영한 덕분에, 의외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팬으로서 매우 보람찬 투어를 할 수 있었다. 알아보니 실제 영화 촬영지를 따라가는 투어 프로그램도 따로 있는데, 내 일정과 맞지 않아서 함께하지는 못했다. 만약에 탈린에서 테넷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있다면, 이 투어 프로그램 일정을 미리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들어가지 못했던 일부 건물의 내부까지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탈린에서 테넷 속 장면 보물 찾기를 알차게 마친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 글에서는 아름다운 구시가지를 돌아본 이야기와, 탈린 방문 전에 알고 갔으면 더 좋았을 정보 몇 가지를 더해서 탈린 여행기 2편으로 돌아올까 한다. 구시가지를 돌아보던 토요일 아침에 날이 화창해서 좋은 사진을 많이 건졌으니 그 사진들도 함께 공유할 예정이다.
사진 출처: 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