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성 Nov 04. 2024

포닥 지원 연대기 1: 오리무중의 9월

과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비과학적 논의

오리무중

미국이나 한국에서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의 박사과정 모집은 전형적인 스케줄을 따라가지 않고, 학교마다 모집 시기가 상이하며, 요구하는 서류 내용도 표준화되어있지 않아서 전반적으로 불확실성이 크게 느껴진다고 한다. 이런 불확실성은 박사 과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포닥 과정 (박사 후 연구원 과정)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펠로우십 지원의 경우 매년 정해진 시기에 공고가 열리므로 오히려 이런 불확실성이 적지만, 포닥의 경우 대부분 각 대학교 혹은 연구소의 펀딩 사정에 따라서 포지션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경우부터,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에서 2, 3 명을 동시에 채용하는 일까지 경우가 다양함을 본격적으로 포닥 지원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각 학교의 '내부자'들은 펀딩 사정에 관해 외부자보다 한발 빠른 정보를 얻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사과정 입시에서 '내정자'가 존재해서 내정자가 여러 유리한 고지를 가져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기도 하다. 학사, 석사, 박사 과정으로 나아갈수록 연구자의 연구 분야와 주제는 더욱 좁아지기 때문에, 포닥 채용을 할 때에는 연구 팀의 인사담당자가 원하는 인재상이 매우 명확하게 정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정보를 먼저 얻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연구 프로파일이 이와 맞지 않는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공고를 내기 전에 먼저 슬쩍 상대방의 의중을 떠볼 기회를 얻기는 한다. 9월 초에 파이널 세미나를 마친 필자에게 첫 번째 중요한 눈치게임은 유럽 연합 차원에서 지원하는 연구 펀딩인 European Research Council 펀딩 수여자로 선정되어 팀을 꾸리는 구상을 하고 있었던 몇몇 연구자들의 생각을 떠보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필자와 연구 주제가 잘 맞는 경우는 아니라서, 아직 공고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너무 큰 기대를 가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로서 당장 내가 가져갈 수 있는 '내부자 어드밴티지'는 딱히 없는 상황에서, 가끔씩 나오는 포닥 공고들을 보면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 좋을지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내 입장에서 양보하기 어려운 몇 가지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예컨대 내가 현재 받는 연봉보다 적지 않은 세후 연봉,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 구사 능력을 Job description에서 요구하지 않는 조건,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곳에서 일할 조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2년 혹은 3년 동안 즐겁게 연구할 수 있는 주제인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고, 이 중 다른 한 가지 조건이 뛰어나게 좋다면 (예컨대 분야에서 아주 유명한 연구자가 매우 좋은 네트워킹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포지션인 경우) 다른 부분을 조금 포기하는 (예컨대 세후 연봉이 현재 받는 금액과 비슷하더라도 일단 지원하기로 결정) 방식의 trade-off를 고려하면서 각 자리의 가치를 매기기 시작했다. 


함정 피하기 

이와 별도로 내 주변에 해당 포지션에 관해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시니어가 있다면 최대한 그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려고 했다. 연구자에 관한 세평이나 연구 프로젝트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을 듣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결격사유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나는 석사 논문 지도교수로부터 간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나의 잘못된 선택이 이후 박사 과정 지도교수 선정이나 박사 과정 중 나의 업무에 지장을 주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석사 과정 당시와 박사 과정 초기에는, 내가 함정에 빠졌음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불행한 일들을 일종의 불가항력으로 생각하고 넘길 수 있지만, 지금은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어느 정도 아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로지 내 책임으로 불미스러운 일을 막아야만 했다. 그래서 내가 지원하는 거의 모든 포지션에 대해 지도교수든,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시니어든 누군가의 의견을 한 번 이상은 물었던 것 같다. 다행히도 대부분은 이런 질문에 친절하게 자신이 아는 내용을 공유해 주었다. 꼭 시니어가 아니더라도, 해당 포지션 공고를 낸 PI와 인연이 있는 나와 비슷한 레벨에 있는 주니어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서로 돕고 사는 게 좋다는 마음으로 유용한 정보가 오고 갔다. 내가 조금 일찍 잡서칭을 시작해 지금은 많이 도움을 받고 있는데, 나중에는 품앗이하는 개념으로 다 갚아나가야 할 호의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상대방으로부터 지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듣거나,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은 의견이 상충되는 순간이다. 지원에 반대하는 납득하기 쉬운 근거를 들으면 "저를 함정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를 표하며 넘기면 그만이지만, 납득하거나 교차검증하기 쉽지 않은 이유로 반대하거나, 모호한 말을 남기는 경우에는 고민이 오히려 깊어졌다. 박한 평가가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혹은 상대방 연구자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고 (이를 캐묻는 것은 다소 무례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에), 특히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에는 엇갈리는 평가 뒤에 어떤 인간관계가 얽혀있는지 한 번 더 스스로 물어야 했다. 논문을 제출할 저널을 고를 때에는 그나마 어느 정도 객관적인 수치라든지, 각 저널에서 퍼블리시했던 논문 기록이 있어서 어느 정도 체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지만, 포닥 자리 알아보기는 체계적인 사고를 통한 지원 전략 짜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거의 없다고 느껴졌다.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첫걸음


이런 고민 속에서 나의 잡마켓에서의 첫 달이 흘러갔다. 2024년 9월에 마감인 포지션은 하나였고, 그 포지션은 프로젝트에서 뽑는 포닥이 아니라 펠로우십 자리였기에 이 포지션에 지원할지 고민하는 과정은 다른 포지션에 관한 고민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9월에 했던 이런 고민은 10월에 내가 지원한 4개 포지션과, 지원하지 않고 넘겼던 최소 3개의 포지션을 평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다음 글은 9월에 지원했던 펠로우십 지원을 앞두고 내가 했던 고민과, 서류를 준비했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