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베로스산책:
녀석이 너무 보채 산책을 나섰다.
눈치보던 바람 역시 우리를 따라 나서는 것을 보고나서야
내가 너무 오랫동안 녀석과 함께 놀아주지 않았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녀석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자리에서 뛰고 돌았다.
기뻐보여서 나또한 기뻤다.
한참을 먼저 달리는가 싶더니, 뒤따라 오는 나를 기다리곤
내 발걸음에 맞춰 녀석도 함께 걸었다.
서로가 말이 없이 나란히 앞만보며 한참을 걸었다.
홀로 나온 것도 아닌데, 너무 무신경했나 싶어 옆을 보니
녀석도 마침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마주하고 잠시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내 서로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말을 다한 것보다 깊이 있는 웃음.
사실, 나의 웃음은 때론 머쓱함을 감추면서 태어나기도 한다.
허나, 녀석의 표정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진실되게 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가 무엇일지 얼른 떠올리려고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소통이라는 건 어쩌면 신뢰를 바탕으로한 긍정적인 착각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내 들었다.
물론, 나는 녀석과 말이 통하지 않기에 전적으로 추측할 뿐이다. 녀석의 표정이 핵심단서다.
여러 의미로 발신된 지난 날 녀석의 웃음을 나는 긍정의 미소로만 이해해왔던 것은 아닐지.
뒤따르던 바람이, 저만치 우릴 앞서갔다.
어느덧 달이 내 어깨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어깨위에 내려앉은 달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녀석을 불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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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des’
녀석의 웃음이 밤하늘을 가득채웠다.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면접 역사상 최초로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낸 사람 또는 내정자.
‘열정’ 이 단어는 한때, 참 강력한 힘이 있었다. 모두가 자신은 무엇을 잘한다, 뭐가 좋다고
이야기 할 때, 제겐 ‘열정’이 있습니다. 이런 숨막히는 멘트는 당시 면접관의 머리 위에
마틴루터킹을 그려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단어의 위상은 전과는 사뭇 다르다. 새 옷도 너무 빨면 헌 옷이 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너무 빨다보니 신선함을 잃었다. 고객의 언어는 탄생과 동시에 기업이 귀신처럼 낚아채서 자신들의 귀한 제품과 서비스에 덧 입힌다.
그리고 여러번 세탁하여 자신들의 언어처럼 사용한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새로운 언어가 발견되면 기업은 더 이상 기존의 것을 빨아 쓰지 않고 그대로 버린다.
고객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운명은 사실, 비슷할 것이다. 업계에 소문이 나면 여러 세탁소가 참여하여 빨아버린다. 새 옷도 금세 해지기 마련.
한 때, 글로벌이 그랬고, 크리에이티브와 솔루션이 그랬고 이젠 ‘혁신’도 지겹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 진짜 열정적이라고 해도 ‘열정이 있습니다’ 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돈달라는 소리가 ‘마케팅커뮤니케이션’으로 변모한 시대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소비자는 의심하고 속고 또 의심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대부분은 제품의 탄생을 ‘나’에게서 찾는다. 즉 나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 헌데, 사기전 까지만 그런 것 같다.
사고나면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내’가 아닌 대다수를 위해 만든제품이기에 내가 몇 가지 아쉬운점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들도 무언가는 희생했을 터.
‘고객중심’에 대한 이해가 고객과 공급자 간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케팅전장에서, 가격이 더 쌌으면 하는 마음과 더 비쌌으면 하는 두 입장의 격돌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다.
크기는 같고 방향은 다른 그 두 힘은 그렇게 휴전선을 긋는 듯 했다.
허나, 시대정신에 슬쩍 떠밀린 그 두 힘은 말도 안되는 한 곳을 가리키게 되었으니 바로, 철학이다.
전쟁 중에 평화를 외친 것과 같은 것일까.
돈 달라는 소리에서 진정성을 외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바로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브랜드에 주목하기 시작했단 점이다.
부정적인 효과도 물론 있다. 너도나도 ‘진정성’을 이야기하다보니 오히려 더욱 의심스러워졌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한 것을 ‘말해줄 때’의 우리의 ‘의심’은 개화開花한다.
그렇게 진정성도 의심되는데, 그 진정성도 ‘나를위해서’ 준비된 것이라고 한다.
슬프게도 이 업계는 모두가 이야기하면 고객입장에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난다. 마케팅에서 이것만큼은 선점의 효과도 없다.
또 하나의 ‘열정’적인 세탁이 일어나고 있다.
전국민에게 당신의 아이돌에게 투표하라던 프로듀스101이 기획된 것은 사실, 내게 좀 충격으로 다가왔다.
90년대 초반, 연예인 데뷔의 과정은 ‘끼’있는 사람을 기획사가 ‘우연히’ 발굴해서 연예계 인맥(유통)으로 데뷔(시장에 선보이는)시키는 것이 대다수였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우연히 압구정에서 캐스팅되서 일약스타가 된 연예인도 많았고 친구따라 오디션 보러왔다가 친구는 떨어지고 자신은 붙은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런 우연한 기회에 스타가 되는 것이 ‘오히려 멋진 배경’으로 작용했다.
스타에게 있어 노력보단 타고난 ‘재능’이 강조된 시절이어서 그랬을까? 당시엔 탈렌트라는 말도 많이 사용되곤 했다.
유투브와 사운드클라우드의 등장은 일반인과 연예인의 경계를 지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우리는 이 두 채널을 통해 일반인도 일정기간 노력을 통해 연예인만큼이나 실력이 쌓이는 것을 확인했고, 그것은 전국에 오디션 예능 붐을 일으켰다.
이미 데뷔하여 성공한 스타와 일반인의 경계는 구분 될지라도,
갓 데뷔할 만한 사람과 일반인은 구분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경계는 소멸되었다.
정말 Bigblur(경계소멸)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오디션 예능이 국민 투표를 반영하긴 했지만, 심사위원은 존재했다.
헤게모니가 아직 심사위원에게 있었고, 우린 그 심사평을 통해 그들의 가치를 판단했다.
마침내 연습생(일반인에 더욱 가까운)을 공개하고 ‘트레이닝’시킬만한 사람에게 직접 투표하라는
국민프로듀서의 임무와 역할이 주어졌다.
힘의 추가 ‘기획사(공급자)’에서 심사위원으로, 심사위원에서 ‘소비자(수요자)’로
더욱 가까워 진 셈이다. 고객의 생산참여가 이루어졌고, 성공은 보장될 수 밖에 없었다.
각각의 일정수요(팬층이 있는)가 있는 멤버를 하나로 모아 그룹화하면 이론 상 그 전체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글로 쓰니 어렵지, 당연한 생각이다.
프로듀스101로 데뷔한 IOI 와 워너원은 사실, 고객의 생산참여가 이뤄졌지만,
11명의 멤버를 선택하면 데뷔가 이뤄진다는 생산자의 ‘준비된 미래’가 있었다.
즉, ‘데뷔멤버’를 결정하는 건 ‘고객’이었지만 ‘데뷔’ 자체를 고객이 결정한 사항은 아니었다.
이미 공급자로 부터 결정된 사항이고, 그 ‘멤버’를 구성하는 것이 프로듀스101의 주된 역할이자 핵심테마였다.
그런데,JBJ는 완벽히 고객(팬)으로부터 탄생했다.
공급자(기획사)가 데뷔에 관한 계획도 사전에 설정하지 않았으며 구성 역시 일절 관여한 바가 없다
데뷔 계획이 없었는데 구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거겠지만.
11명의 데뷔멤버로 발탁되진 못했지만, 각기 다른 사람을 응원한 팬들은 이렇게 조합된 그룹이 나온다면
내가 기꺼이 응원할 것이다’를 외쳤고
각 소속사는 결국에 없던 ‘데뷔계획’을 고객의 요구로 작동시켰다.
그렇게 구성원과 포지션, 그룹명까지 모두 팬들에 의해 탄생했다.
기획사가 발굴하여 준비시켜 세상에 선보이던 ‘전통적방식’에서 고객(팬)이 직접 선택하고
구성과 데뷔를 결정하는 ‘고객지시’가 가능한 세상이 온 것이다.
차려주던 밥이나 게걸스럽게 먹던 consumer 는 이제 점점 사라질 것이다.
직접 내가 한 ‘밥’을 먹었던 경험을 다른 산업과 서비스에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까?
어떤 제품과 서비스에서는 ‘자유롭게’ 의사를 반영하고 그 결과값을 확인 할 수 있었는데,
또 다른 제품과 서비스에서는 그것이 어렵다면
고객은 그 다른 서비스를 대체할 서비스가 없을 때까지만 그 서비스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모든 기대는 긍정적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내 의견이 반영된 결과물을 내가 구매했을 때 얻었던 그 만족감을
다른 서비스에서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내가 구매하는 제품과 서비스는 다양하지만 그것에 어떤 ‘기대’를 갖는 ‘나’는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가장 빠르게 깨닫고 실행에 옮기는 자만이
‘고객중심사고’ 와 ‘진정성’이란 키워드를 소구할 채널전략을 구성하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고객은 더 이상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준다는 ‘고양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고양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 힘을 내게로 넘기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