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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xtHaDes Apr 29. 2018

시작은 욕망, 끝은 성찰이다

레테의거울 : 끝과 시작에 대한 이야기



天下没有不散的筵席
하늘아래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다고 했다
그럼, 연회가 끝난 뒤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일주일이 지났다.

동료는 떠났고, 친구는 솔로생활을 청산했다.

무한도전은 종영했고, 팬들이 낳은 JBJ 는 해-산했다.


몇몇은 응원했고, 또 몇몇은 아쉬워했다.

‘현상’에 대한 행동이 다르다고 ‘팬’심이 의심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너무 슬퍼한다고 ‘더’ 아꼈던 것이 아니고

너무 응원한다고 ‘덜’ 아쉬운 건 아니니까.


이건 마치,
길 가던 아이가 넘어져 다쳤을 때, 누군 일으키려하고
누군 달래고, 누군 부모를 찾거나 약을 구하는 상황에서
일으키지 않았다고, 혹은 먼저 달래지 않았다고
인간성을 의심받는 것과 같다.
의심은 괜찮지만, 판단은 다른 문제다.
판단 후 몰아가면 ‘조직적’ 폭력이다.
B-A의 값이 아무리 커도, 애정도가 없다면 서운함은 없겠지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있다’
‘End가 아닌 And’


아직까지 어디서는 활용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허나, 헤어짐에 대한 슬픔을 다스리는 말로선 진부한 표현임에는 틀림 없다.

‘표현’은 진부하지만 안에 담긴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모두가 공감하는 ‘문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1.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있다?


우리가 슬퍼하는 ‘끝’은 일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끝이 아닌 ‘완성,완료’로 표현된다.

우리의 ‘끝’은 사람과의 헤어짐이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떠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메시지는


결국, 내가 널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조차 잊고 사는 이 시대에 말이다.

나를 잊고 ‘역할’에 맞춰 평가받는 삶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시간마저 잘게 쪼개, 타자를 기억하겠다는 것.

인간은 효율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이다.


재밌다. 불완전한 존재의 합리적 기준과, 효율
그들은 자유를 원했지만, 인간이 말한 자유는 ‘신들의 자유’와는 의미가 달랐다.
감옥을 벗어나는 자유가 아닌, 감옥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것을 알았다면
에덴을 만들진 않았을텐데
프로토타입은 신이 만들어도 완벽하긴 어려운가보다.
신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우렁차다하지만, 뇌를 지배하는 건 귀에서 흘러나온 흰색 연가시때문이고,
눈은 두 개지만 사이클롭스보다 좁은 시야를 갖게 된 건 영리한 사각형의 친절함때문이다.
뱀의 친절함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잊은지 오래다.


‘잊혀질 수 밖에 없다는 것, 예전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망각​’​을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망각은 파괴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노력을 통해서만 ‘망각’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그래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하겠다고 했으리라.

님은 갔지만 님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이 아니다.


2.End가 아닌 And ?


끝은 사실, 결국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꽤 어린나이에 체험하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아이들이 우는 시간은 의외로 그 아이가 당시 느꼈을 감정적 충격에 비해 굉장히 짧다.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졸업식이 지나야 또 다시 새로 생활이 시작된다는 것을.

시간이 더 흐르며 그 과정을 반복하면 그 끝이 성장을 위한 시작점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영원한 끝이라 치부되는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와 남겨진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슬픔의 길이와는 별개로 말이다.죽음의 영향력은 강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시작’으로 이끌어내기 때문.

그래서, 슬픔을 거두라는 말대신 이 메시지를 전한다.

이건 끝이 아니다.


죽음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시작점을 부여한다.
始作: 비로소 시, 행하다 작
비로소 하게되는 것이 시작의 뜻이라면, 시작은 언젠가 해야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해야할 일이라는 것은 언젠지 모르지만 나에게 ‘주어진’ 어떤 사명과도 같은 것이다.
단, 한번도 요리를 해본 적도 없고 재주도 없던 남편이 죽음을 앞둔 아내의 부탁으로 요리를 시작했고
그 과정을 책으로 낸 것이 인기다. 떠나는 아내는 홀로 지낼 남편이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게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맛이 없으면 입에 대지 않았고  그 과정을 남편은 오롯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 남편에게 ‘요리’란 언젠가 해야할 일이었다. 허나 그렇게 시작될 것임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예측했다면 맞았을까?
인간은 굉장히 귀여운 면모가 있다. 불안을 극복하기위해 ‘예측’이라는 것을 한다.
하지만, 신은 더욱 귀엽다. 그것을 뒤흔들고 도망간다.


인간이 인간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은 ‘시작점’ 보다 ‘끝점’에서다.

욕망이 잉태한 ‘시작’은 함께하는 모두가 ‘희망’에 눈이 멀어 있다. 어쩌면 가장 ‘영웅’에 가까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그 격분과 광분의 상태.

하지만, 여정이 시작되고 시작 전 ‘외면했던 위기’를 만나면 희망에 가려졌던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돈키호테의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돈키호테가 여행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이다.
여행이 시작되면 비로소 그의 이상과 현실사이의 격차가 ‘차가운 웃음’을 낳는다.
차가운 웃음을 ‘타인’의 얘기라 생각하며 우리는 그 모습을 즐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서사는 단 한번도 ‘남’의 얘기를 해준적이 없다.


시작은 욕망에서 탄생하고 끝은 성찰을 낳는다.

성찰은 다시, 욕망을 성장시키고 시작을 잉태하게 한다.
그래서 끝이 중요하다.


세포는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지만, 욕망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기존의 모습을 버리며 성장하는 욕망은 새로운 시작을 잉태한다.

거대한 욕망이 잉태하는 거대한 시작은 이제 개인이 아닌 무리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한 점이 된다.

그것이 긍정적인 미래를 비추는 광명일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광염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독재자의 어린시절이 우리와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시작은 위대하나 결국 하나의 점이다.

끝을 통해 선으로 완성되고, 갖춰진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욕망의 형태를 가늠할 수있다.

이것이 성찰을 낳는다. 끝을 통해 시작해야만이 초심도 태우는「火」 망각과 시야를 가리는 희망 속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끝은, 시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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