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진다
익숙하지 않은 곡을 연주할 때는 바쁘다. 우선 마음이 바쁘다. 난 언제쯤 이 곡을 완주할 수 있을지 조급하다. 손가락도 바쁘다. 잘못 누른 건반에서 얼른 손가락을 떼고 원래 마음이 향하던 건반을 눌러야 하니까. 그리고 눈이 바쁘다. 악보에서 건반으로, 건반에서 악보로 눈은 손가락보다 빨라야 한다.
재즈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따라서 연주하고 싶은 버전의 악보는 존재하지 않지만, 원곡의 멜로디와 코드를 적은 리드 시트를 보고 곡을 시작한다. 악보를 보는 게 더 익숙했던 나의 뇌는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해석해야 한다. 악보로 그려져 있는 멜로디가 하나고, 알파벳으로 적혀 있는 코드가 다른 하나다. 악보는 보이는 대로 손가락을 누르면 되지만 코드는 알파벳을 다시 오선지로 바꾸는 회로를 한 번 더 거쳐야 한다. 눈과 손가락과 마음이 한층 더 바빠진다.
피아니스트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클래식과 재즈를 막론하고 무대 위에서 악보를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암보'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음악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서다. 악보를 외우면 편하다. 적어도 눈이 왔다 갔다 하지는 않아도 된다. 악보 연주의 관행을 처음으로 깬 것으로 알려진 클라라 슈만은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외워서 연주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면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에요.
악보가 눈에서 멀어지면, 손가락은 자유로워진다. 악보에 눈이 갈 시간에 어느 건반을 누를지 더 빠르게 판단할 수 있고, 악보에 눈이 갈 시간에 터치의 강도를 한 번 더 고민해볼 수 있다. 암보의 장점을 알고 있었기에 레슨 선생님의 질문을 듣는 순간 처음엔 의아했다. "외워보실 수 있겠어요?" 10페이지가 넘어가는 긴 곡도 아니고, 이렇게 짧은 리드 시트를 외우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거지? 한 페이지짜리 리드 시트 외우는 건 금방이지!
그런데 이게 웬일, 한 페이지짜리 리드 시트를 외우는 게 참 어려운 일이다. 오선지 악보를 외우는 데 익숙한 나는 코드를 외우는 게 쉽지 않다. 멜로디는 익숙해져도 코드는 여전히 헷갈린다. 오른손은 적어도 멜로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알고 있는데, 왼손은 갈피를 잃는다. 정해져 있는 음을 그대로 외우는 게 아니라 연주할 때마다 보이싱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분명히 외우는 꿀팁 같은 게 있을 텐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무조건 외워’ 방법밖에 없는 걸까 싶다가도 그렇다면 나는 하나의 코드에 하나의 보이싱만 누를 수 있는 사람이 될까 봐 걱정이 된다. 하나의 코드에 하나의 보이싱이라도 외우고 있는 사람이 된다면 물론 그건 다행이지만.
리드 시트를 외워서 손가락에게 자유를 하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레슨 선생님이 또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다. "눈을 건반에도 두지 마세요." 선생님이 악보를 외우라고 한 건, 눈의 피로도를 낮춰주기 위한 게 아니었다. 눈을 악보는 물론 건반에서도 멀어지게 하라는 게 더 큰 목적이었다. 그래야 오로지 그 멜로디에 어울리는 보이싱과 화음을 자연스럽게 찾아갈 수 있다는 거였다.
리하모니제이션을 해 보면 수학 계산을 하듯이 코드를 바꾸게 될 때가 많다. 도미넌트 코드니까 증4도 위에 있는 코드로 바꿀 수 있다, 서브 도미넌트를 써서 코드를 바꿀 수 있다, 이렇게 계산을 하며 바꾸는 것이 '정석'의 방법이다. 선생님이 말한 방식은 음악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보이싱과 코드를 찾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어울리는 음을 먼저 찾고 난 다음 이 코드를 분석해 보면, 들어맞는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처음엔 코드를 보면 누를 수 있는 노트와 보이싱에 집중했다. F Maj7 코드면, 파-라-도-미에 텐션 9(솔), 13(레)를 누를 수 있지...라는 사고 회로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절대로 쳐서는 안 되는 어보이드 노트를 제외하고는 어떤 걸 눌러도 화음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음악은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그러니 다양한 음을 발굴해 보라고! 역시, 정해져 있는 영어 단어를 무작정 외우는 걸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성장한 사람에게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코드까지 외우라는 재즈는 참으로 어렵다.
한 가지 좋은 점은, '눈에서 멀어지면'이라는 구절 뒤에 새로운 말을 덧붙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게 아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어쩌면,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