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non May 05. 2022

악보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국어책 읽는 연주'를 하지 말 것


 합주를 할 때 가장 난감한 경우는 아무리 들어봐도 도저히 채보를 할 수 없을 때다. 클래식 음악으로 처음 피아노에 입문했기 때문인지, 나는 코드보다 악보에 익숙하고, 화음(코드)을 한 번에 듣기보다 멜로디에 들어간 노트 하나하나를 듣는 게 편하다. 아직도 코드만 놓고 연주하는 게 영 익숙하지 않다. 꽉 채워진 악보를 눈앞에 펼쳐 놓아야, 마음 편히 건반 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악보를 채우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카피를 할 때도 악보를 다 그리기보다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 중요한 멜로디나 보이싱을 그려 넣는 정도다. 그러다 보니 합주를 하기에 앞서 악보가 있는지, 최소한 코드 진행이 알려져 있는 곡일 때 합주곡으로 정하게 된다. 나에게도 듣는 족족 코드를 알아맞힐 수 있는 청음 능력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말이다.


작년 크리스마스는 운이 좋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곡의 온전한 악보를 찾았기 때문이다. 국내 재즈 피아니스트인 송영주 버전의 Joy to the world. 몸을 들썩이게 되는 캐럴인데, 그 바탕엔 펑크 리듬이 있다. 

https://youtu.be/sbvZnWkW25Y

이 곡이 수록된 송영주의 크리스마스 앨범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앨범 중 하나인데, 글쎄 거의 전곡을 담은 악보가 있는 게 아닌가!  단숨에 서점으로 달려가 악보집을 구매한 나는 밴드 친구들에게 우리의 올해 크리스마스 곡을 선언했다. 크리스마스를 겨우 6일 앞둔 주말, 어른이들은 초록색, 빨간색 옷을 맞춰 입고는 합주실에서 만났다.


크리스마스 Joy to the world를 위해 모인 어른이들.

오랜만에 합주를 해서였을까, 친구들은 내 피아노 소리가 정말 듣기 좋다는 감상평을 들려줬다. 난 신나서 외쳤다. “악보가 있었어! 나는 악보는 잘 본다구!” 하지만 베이스 친구는 그 뜻이 아니라고 했다. “악보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느낌이 전에 비해 너무 잘 살아 있어.” 그동안에도 악보가 있는 곡은 여러 번 했지만, 이번엔 더욱 ‘재지’하게 들렸다는 말이었다. “그럼, 레슨 덕분인가?”


악보를 보는 것도, 그걸 손가락으로 옮겨오는 것도 혼자서 잘할 수 있기 때문에 레슨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 부분에선 힘을 빼고, 이 부분에서는 점차 쌓아온 에너지를 한 번에 터뜨리기. 이런 다이내믹을 살리는 건 악보에 표현이 되어있다면 오히려 수월한 편이다. 까다로운 박자도, 곡이 너무 빨라서 잘 굴러가지 않는 손가락도 차근차근 연습하다 보면 결국 해낼 수 있다.


도저히 '독학'이 되지 않는 건 재즈의  ‘뉘앙스’다. 분명히 음은 제대로 누르고 있는데, 왜.. 느낌이 안 살지? 아무리 악보를 볼 줄 안다고 해도, 그 리듬을, 재즈의 그루브를 살리지 못하면 ‘국어책 읽기 연기'와 다름없다. 레슨을 통해서 배운 건 바로 그 ‘뉘앙스'였다. 마치 로봇처럼 건반을 누르고 있는 내게, 선생님은 뉘앙스를 살릴 것을 주문한다. ‘음을 살짝 뒤로 밀듯이', ‘음을 앞으로 더 당겨오듯이 리듬감을 살려서' ‘끈적끈적하게' 같은 표현은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옮기는 게 쉽지 않다. 마치 필라테스에서 ‘흉곽을 닫으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렇지만 역시 연습은  배신하지 않는다. ‘뉘앙스'도 살리는 날이 오는 걸 보면 말이다.


‘Joy to the world’ 레슨 2주 차, “지난주에는 정박에 맞춰서 연주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완전히 곡에 올라탄 것 같네요"라는 레슨 선생님의 말에 환호의 박수를 쳤다. 그저 박자에 어긋나지 않게 맞춰 연주하는 것과 리듬에 올라탄 연주는 그 차이가 엄청나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리듬에 올라타게 되면, 정말이지 신이 난다. 악보만 있으면 다 될 거라는 생각은 나의 오만이었다. 악보에는 적혀 있지 않는 그 뉘앙스를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는 재즈를 연주할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 재즈 연주자들의 곡 혹은 재즈 버전으로 편곡한 곡 (내가 그동안 들었고, 연주하고 싶었던 곡)들의 악보는 왜 이렇게 구하기가 어려운 걸까. 연주자들이 딱 하나의 버전을 정해 악보로 남겨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싱이나 솔로 라인을 정해두더라도 재즈의 특성상 매번 조금씩 다른 연주를 하게 되는 데다가 오늘의 버전이 최상의 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묘한 박자를 음표로 그리는 게 불가능에 가까울 때가 많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악보가 존재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자신이 연주한 버전에 자신이 있는 대가가 부지런히 악보를 남겨두었거나, 혹은 길이 남을 연주를 후세에서 열심히 채보해 준 경우이기 때문이다. (빌 에번스의 연주가 악보로 존재하는 걸 보고 이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됐다.)


‘악보대로 치는 것을 제일 지양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악보가 존재함에 감사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방패 삼아 일단 악보를 보고 연습해보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다만 앞으로는 눈이 아닌 귀로 모방하려는 노력을 조금 더 해봐야겠다. ‘뉘앙스'를 찾기 위해서.



매거진의 이전글 눈에서 멀어지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