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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인류연재

망상과 축구

by 준혜이

겨울은 실내 축구 시즌이다. 사실 축구는 모든 계절, 안팎으로 장소만 바꾸어 계속되는 체육이다. 동네 축구와 달리 실내 축구는 남편이 자발적으로 소년 친구들로만 팀을 짜 운영한다. 올 겨울에도 남편은 지난해처럼 소년 친구들을 있는 대로 다 끌어 모아 두 팀을 만들었다. 한 팀은 가장 높은 디비전, 또 다른 한 팀은 가장 낮은 디비전에 속한다. 소년은 이 두 팀 모두에서 경기를 뛴다. 한 사람이 같은 신체 조건과 실력으로 경쟁 상대, 비교 대상이 바뀌면, 동료 또한 달라지면 타인으로부터 얼마나 다른 평가를 어떻게 받게 되는지 소년을 통해 우린 생생하게 경험한다. 이로써 나에 관한 타인의 평가를 인식하는 즉시 거울삼는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나, 주위를 세심히 둘러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봐야 결국 파국이다, 동네방네 떠들고 싶어진 건 절대, 절대로 아닙니다.

가장 높은 디비전에 속한 대부분의 팀들은 6학년, 중학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팀은 4학년, 5학년, 6학년이 골고루 섞였고. 우리가 상대하는 팀이 어쩐지 모두 백인인 것만 같다고 생각할 무렵 아, 우리 팀 애들도 한국, 중국, 베트남 애들 위주구나, 깨닫는다. 그리고 잘 봐, 백인 사이에 유니폼을 뒤집어 입은 저 유일한 흑인 소년. 전반전이 끝나고도 유니폼을 바로 고쳐 입지 않은 그 소년에게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저렇게 등번호를 가린 다음 상대팀 코치가, 저 흑인애를 막아! 외치는 순간을 기다렸다 어른을 상대로 정의로움을 뽐낼 전투를 벌일 중학생떼를 상상해 보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애들이 쟤네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작고 몸집도 반만 해서 이런 망상에 빠져든 게, 그게 아니라요.

가장 낮은 디비전에 속한 대부분의 팀은 여러모로 그 실력과 정체를 한눈에 알아챌 수 없다. 그럼에도 반박이 불가한 이들의 공통점은 팀 안에 눈에 띄는 슈퍼 스타가 하나씩은 꼭 존재한다는 사실. 이 디비전에서는 관중으로서 과격한 응원을 선보이기엔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기가 반복되는 듯하다. 하지만 작년에 우리 팀이 이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으므로 긴장감이 떨어지는 승부가 펼쳐질수록, 이번에도 혹시, 기대가 되니.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 팀 슈퍼스타는요, 냉정하게 나의 소년 아닌 남의 집 소년 골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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