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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샘 Jun 25. 2019

[여행] 제주 단산가는 길

그렇게 우리는 낙조를 보고 헤어졌다.

 스무살 초반에 혼자서 떠났던 기차 내일로 여행에 대한 기억은 현재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행복하고 벅찬 마음만큼은 여전히 빛을 발하지 않는 소중한 추억이다. 여행중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하다가 다음 날에 헤어지고, 경주에서 우연히 만난 아주머니께서 산 정상에서 하모니카를 불어주셨던 특별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그렇지만 처음 만난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스무살 초반이라 가능했던 것이다, 라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에서 초반과 후반이라는 나이는 만남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해준 길이 바로 단산 오름이었다.


 사실 나는 제주도에 여행하는 중이 아니라 사는 중이다. 1월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때 하루하루 소중하게 보내자고 다짐을 했지만, 시간이 흘러서 벌써 반년이 흐른 지금 일상이라는 권태는 제주도라고 하더라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숙소에서 '방콕'을 하고 별다른 외출을 하지 않은 날이 점점 반복되었다. 아~무 일도 없는 아주 고요하고 조용한 평화롭게 흘러가는 하루. 출근, 퇴근에 맞춰 피곤하고 치열하게 일했던 작년에 비하면 황홀할 것 같지만, 멈춰있는 듯 고요하게 머물러있는 하루에 점점 무력감을 느끼며 제주에 있어야 하는지에 권태를 품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집에 있기 답답해서 제주도에 있는 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가까운 오름을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름'이라는 어감이 '산','등반','트랙킹',과 다르게 완만하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서, 편하게 굽이 있는 샌들을 신고 외출했다.


 집에서 멀지 않아서 선택한 단산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를 왔을 시절 자주 올라갔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단산은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고, 202번 버스를 타고  안성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근처에 <대정로스터리>라는 핸드드립 전문 카페도 있다.

202번 버스를 타고 가다 잘못 내려서 다시 갈아타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도중에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구경했다.


 정류장에서 하차한 뒤에 앱 길 찾기로 검색하며 걸었다. 마을을 걸어가는데, 앞에 단산에 가는 것 같은 두 사람 말고는 내가 가려는 단산 가는 길에 아무도 없었다. 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갔지만, 너무 난감했다. 보통 산 입구부터 표지판이 있기 마련인데, 단산은 어디가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서가는 여자 두 분을 눈치로 따라 올라간 덕분에 나는 길이 아닌 길을 올라가 입구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

 (왼쪽) 이 길을 통과해야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만약 나는 앞서 걸어갔던 두 분이 아니었다면 결국 찾지 못하고 올라가지도 못한 채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이 두 분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두 분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두 분은 입구에 위치한 정자에 잠시 쉬다가 갈 모양인지, 나의 인사를 받아주시면서 앉아 계셨다. 나는 그렇게 먼저, 혼자서 단산을 올라갔다.

작든, 크든 산은 산이다. '오름'이라는 어감에 속아 가벼운 마음으로 굽 샌들을 신고 온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올라가는데 여러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경사가 엄청난 끝도 없는 계단을 헉헉 대면서 겨우 올라가 보면, 계단이 없는 자리에는 암벽 등반을 떠올리는 바위를 밟고 올라가야만 했다. 진짜 힘들었다.

 나 자신과의 힘든 사투 끝에 겨우 도착한 정상은 위태롭고 아름다웠다. 한 발만 헛디디면 바로 추락할 수 있는 바위에 앉아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며 경치를 감상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입구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두 분도 어느덧 정상에 올라와서 사진을 찍고 계셨다. 올라올 때 많이 힘들지 않았냐는 등 다시 말을 건네고 내려가려는 나에게 두 분 중에 한 분이 혼자서는 위험하니까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하산을 하게 되었다.

 만난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은 내가 어색할 법도 할 텐데, 샌들을 신고 온 내게 바위를 밟고 내려갈 때 손까지 잡아주셔서 고마움에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두 분은 한경면으로 한 달 살기를 오셨고, 나 역시 1월에 제주도에 내려와 사는 중이라고 말씀드렸다. 두 분 중에 한 분은 말수가 적었고, 한 분은 내게 갔던 여행지와 함께 근처에 좋은 카페나 맛집도 함께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잘 통하다 보니까 하산하고, 거의 정류장에 다 와서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함께 유명한 빵집을 가게 되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사람이 많아서 들어갔는데, 맛있다고 추천해주신 <미쁜제과>. 우리는 함께 맛있는 피칸 파이와 양파 베이글과 케이크를 함께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빵집을 나온 뒤에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해안도로를 따라 한 시간 이상을 걸었다. 시간에 맞춰 낙조를 보기 위해서.

 단산 올라가는 길의 고됨도 금방 잊게 된 두 분과의 동행길. 

 차귀도 섬 보이는 아름다운 한경면 낙조.


 반 년 동안 거주하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낙조. 무엇보다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채로 함께 낙조를 보고 헤어진 두 여행자와 함께 한 순간이라 더욱 좋았다.


 단산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우리는 그렇게 낙조를 보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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