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솔지책 Sep 22. 2022

아니 근데 고객님 제가

수화기 너머의 노동자들



아주 신명이 날 만큼 날이 좋은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이 날씨에 책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을

무릅쓰고 오늘도 책을 소개하러 네요..

전 모르는 게 약이다, 와 아는 게 힘이다, 사이에서 언제나 후자를 믿으니까요!


김관욱, 《사람입니다, 고객님》, 창비, 2022.


시간이 흘러도 어쩌면 그대로

— 의사이자 인류학자 김관욱이 쓴 이 책은 콜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담원들의 모습에서 산업화시대 여공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특히 여공이 많았던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콜센터 상담원이 많이 등장하기도 하고요.

— 여공과 콜센터 상담원은 언뜻 보기엔 다른 것 같지만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도 다르지 않아 놀라게 되는데요.

— 가장 비슷한 건 압도적으로 여성의 수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비정규직이 압도적으로 많고 보상은 적고 스트레스는 극심합니다. (오래전부터 여성이 다수인 직종은 으레 사회적으로 무시받으며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성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니 별다른 전문성이 필요하지 않잖아? 라는 의식과 여성의 노동 자체를 폄하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여공들이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먹으며 끊임없이 노동을 해냈듯, 콜센터 상담원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떨치고 얼른 또 다른 콜을 받기 위해 담배를 피우며 버팁니다. 오죽하면 콜센터에 흡연실이 없으면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할 정도예요.



왜 상담원들은 거의 전부 여성일까?

— 고객센터든 어딘가든 전화를 걸면 대부분 여성이 받지 않나요? 이 책에 의하면 ‘서비스는 역시 여자’라는 인식이 작용한 거기도 해요. 물론 여성의 임금 자체가 남성보다 낮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고요.

— 그렇다고 남자들이 콜센터 상담원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3퍼센트 정도 비율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책에 의하면 어떤 남자 상담원은 콜센터 일을 한다고 했더니 “너 갈 데까지 갔구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요. 그런 일은 여자가 하는 거야, 라는 공고한 (무)의식이 작용하는 거죠.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성 고정관념이 작용하는 겁니다. 근데 정말로 뭐가 “갈 데까지 갔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 이 업계가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들어오기 쉽다는 점도 있어요. 주부로 살다 일을 다시 시작하려는 여성들이 갈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지만 콜센터 상담원은 비교적 쉽게 진입이 가능하거든요. 물론 그 안에서 버텨내는 건 아주 힘든 일이지만 처음엔 그걸 알 수도 없고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는 하루

— 아마 어떤 분들은 그래도 앉아서 전화만 하잖아? 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말 그대로 앉아서 전화를 걸거나 받는 업무지만 그 통화는 굉장히 불친절하거나 폭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상담원들이 들었던 말들이 실려 있기도 한데요, 음.. 전화를 건 사람이 나와 같은 종이라는 것이 짜증날 정도더라고요. 매 분, 매 초 걸려오는 전화가 다 그런 식이라면, 하루 내내 그런 통화를 반복해야 한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견뎌낼 수 있을까요?

— 게다가 모든 상담원은 콜 수의 압박을 받습니다. 콜센터 시스템 자체가 상담원들의 자리 이탈 여부와 콜 수 등을 엄격하게 감시하기에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는 게 허용되지 않기도 해요. 어떤 콜센터는 ‘빠르게 손을 들어야만’ 화장실을 갈 수 있고, 몇 분 자리를 비우는 것에도 굉장히 민감해서 담배도 4분 컷을 합니다. 콜을 계속 받아야 하니까 담배는 그마저 봐주는 수준이고요. (담배는 상담원들뿐만 아니라 콜센터 자체에도 굉장히 필요합니다. 상담사들이 계속 콜을 받게 하려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해소해야 하는데 담배만큼 적절한 게 없거든요.)



자신(의 몸)을 거부하게 되는 상담원들

— 상담원들의 업무 스트레스는 많은 질병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상담원들이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는 데 있어요. 난 욕을 먹어도 싼 사람이구나. 내가 못 배워서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성격이 거칠게 바뀌고 쉽게 우울해지면서 술과 담배에 더 의존하기도 해요.

— 끊임없이 욕과 화를 받아내는 업무는 결국 어떤 이들에겐 이런 결과를 가져와요. 안 그런 사람도 당연히 있겠지만 그건 그 사람이 대단한 거겠죠. 상처에 무뎌지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지지 않기 위해” 써내려간 상담원들 이야기

— 앞에서 이 책의 저자가 의사이기도 하다는 말을 썼는데요. 콜센터 상담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상담원들을 환자로 많이 봐서 그런 거였대요.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고 힘들어할까? 이유가 뭘까? 싶은 마음에 살피다 보니 인류학 공부도 시작했다고요. (상담원들의 업무를 알게 된 저자는 그들에게 도저히 담배 끊으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도 썼습니다.)

— 책 처음과 마지막에 이 이상한 흐름과 문화에 “지지 않기 위해” 그들에 대한 글을 썼다고 고백하는데요, 상담원들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써내려간 저자 덕분에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상담사들의 노고와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 같더라고요. 지고 있다는 느낌은 떨치지 못하겠지만 “너는 못 배워서 이런 일 하고 있지?”라는 말을 수시로 듣는 상담사들과 함께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사족

— 사회학에 관심 있는 분들은 재미있게 읽어내려가실 수 있을 거예요. 인류학 논문이 절대 아니니 겁 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저자분이 글을 잘 쓰세요. 이것이 진정 문이과 통합 인재구나.. 싶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 우리와 똑같이 존중받을 존재라는 걸,

어떤 노동을 하든 우리 모두 한낱 인간이라는 걸 당연스레 여기는 세상이 오길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내 삶은 오로지 너였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