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들이 일을 잘하는 이유
어떤 사람이 '일'을 잘하는가?'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물음이지만, 우리는 이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엇나간 고민을 한다.
어떤 사람이 '취업이 잘 되는지' 말이다.
취업 잘 되기 위해 참 많은 준비를 한다. 자기계발이라고. 영어 공부도 하고, 컴퓨터 자격증도 따고, 무슨무슨 대외활동도 하고 그런다. 우리 딴에는 기술을 쌓는 거다. 회사가 자신을 바로 써먹을 수 있게끔 하는 그런 기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술들이 실제로 일 잘하는 것과 연관이 깊은지는 잘 모르겠다.
미학자 진중권이 토론회에 나와 '영어'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대학에서 비즈니스 스쿨 외에 회화를 따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원래는 외국인과 제대로 된 대화를 못했다. 근데 처음으로 외국인과 말이 통하던 때가 있었는데, 바로 철학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였다. 막히는 것 같으면서도 신기하게 대화가 되더라. 사람들은 자기가 할 말이 있으면 언어가 달라도 어떻게든 소통한다. 학창시절 내내 영어를 배우면서도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할 말이 없고 의견이 없는 거다."
언어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평생 영어 공부를 해왔는데도 영어가 늘지 않는 이유는 진중권의 말처럼 영어를 통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말을 듣고 바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외국인과 만나면 무슨 대화를 하려고 할까? 기필코 나누고 싶을 정도의 이야기가 있을까? 그냥 날씨나 지나가는 풍경 말고 평소에 깊은 관심을 끌어내는 그런 주제말이다.
'덕후'라는 말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을 가리키는 '오타쿠'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본래의 뜻을 넘어 '특정 분야를 파고드는 집요한 사람 혹은 전문가'로 통용된다. 축구를 좋아하면 '축구 덕후', 케이크를 좋아하면 '케이크 덕후'가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덕후는 사교성이 결여된 사회 부적응자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급변하는 사회에 무언가를 기획하고 창발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대중과 소통하는데 이 '덕후력'이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평소에 무언가에 집요한 관심을 보여본 사람은 일을 할 때도 덕후력을 발산하는 '메커니즘'을 알고 있다.
덕후들의 특징은 단순히 '좋아함'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의 집요함이 정보화시대를 만나 방대한 양의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지식을 재창조한 다음, 또 그걸 온라인에서 소통하려고 한다. 요즘 느끼는 것은 이 덕후력이 있는 사람이 트렌디한 시장에서 일을 잘한다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한 IT벤처기업에서 새 인턴을 뽑았는데, 그는 유학을 다녀왔고 컴퓨터 능력도 꽤 준수한 사람이었다. 나름 괜찮다 싶어 일을 시켜봤는데 버벅대더란다. 뭐 버벅댄다기보다 꾸물꾸물의 느낌이다. 시키는 건 하는데 그 다음에는 뭘 할지 몰라 허덕인다. 벤처기업에서는 스스로 뭔가를 기획하고 만들어가는 능력이 중요한데, 주어진 일만 끝내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다.
반면에 평소에 미국 만화 덕후였던 다른 인턴은 주어진 일 외에도 스스로 박람회장을 찾아가서 우연히 마블 팀장을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이미 상대방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상투적인 대화는 하지 않는다. 그날 이후 마블과 계속 일을 논의하고 있고, 또 그날 만난 일본 회사와 출판만화 협업도 진행하고 있다. 영어로만 보면 위에 유학 다녀온 직원이 더 잘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우연히 만화를 좋아해서 얻어걸린 것도 있지만, 중요한 건 메커니즘이다. 평소에 자신이 원하던 정보를 집요하게 찾고 만들어본 사람들은 일을 할 때도 그러한 능력을 발휘한다. 뭔가가 필요하다 싶으면 정보를 찾고, 재가공하고,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가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일은 시험이 아니라 실전이기 때문에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보다 누가 더 좋은 일을 꾸며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실 그동안의 우리 교육은 스스로 뭔가를 만드는 능력을 전혀 키우지 못했다. 한 대학 교수님이 말하길 '딸 공부시키게 시험 범위 알려달라'고 전화를 걸어오는 학부모도 있단다. 암울한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왔는데, 그래도 요즘 덕후들을 보면서 약간의 기대감이 생긴다. 여러분 주위에도 관심사 뚜렷한 친구들이 있지 않는가? 이 분야만큼은 저 친구에게 물어보면 될 것 같은 친구들, 그들이 바로 덕후들이다. (잉여랑은 다르다)
하지만 스펙 쌓는데 여념이 없는 우리 학생들은 '덕후적인 좋아함'에 시간 쏟는 것을 불안해한다. 토익과 자격증, 학점 등 눈앞에 과제를 해결하기에도 바쁜 청춘에게 그런 건 시간낭비다.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상이 획일화된 탓이기도 하지만, 이미 많은 학생들이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 창조경제를 말하고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들이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암울한 일이다.
10년, 20년이 흐르면 그나마 남아있는 기업의 관료 시스템이 많이 사라질 텐데, 그땐 스스로 만들어가는 능력이 지금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처음에 영어 얘기를 꺼냈는데, 결국 일 얘기와 일맥상통하다. 무언가를 '집요하게 좋아해봐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떤 정보든 마음대로 찾을 수 있고 재가공할 수 있는기 때문에, 기술 자체를 배우는 것보다 그 기술을 잘 다룰 수 있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오래 살지는 알았지만, 인생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더라. 오히려 가슴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보일 때가 더 많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졸업 축사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 글을 끝맺기에 제격이다. 잡스는 힌두교 덕후, 채식 덕후, 미니멀리즘 덕후였다.
"여러분은 과거에 행했던 모든 일이 결국에는 미래와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능을 따르든, 운명을 따르든, 업보를 따르든 그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서 하나의 길을 이룹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가슴이 따르는 대로 움직이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설사 당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겁니다."
여러분은 덕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