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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ul 01. 2024

엄마의 사진첩, 아들의 폴더폰 그리고 나의 브런치

2024년도의 반도 이제 추억의 영역으로 저물고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흐름에 가속도가 붙는다고 하는데, 채 속도를 느낄 새도 없이 성큼 건너뛰어 여름의 한복판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夏至)가 지난 지금, 올해의 우리에게 남은 것은, 빛바랠 푸르름과 짧아질 해의 길이겠지요. 시간의 어느 구간이 뭉텅이째 빠져버린 듯한 이 느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요. 그래서일까요, 문득 지난 상반기를 되돌아보고 싶어졌어요. 분명 매일 1,440분, 86,400초라는 시간이 내게 주어져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내가 한 것,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요.



지난 6개월을 떠올리려니, 즉각적으로 제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어요.
처음으로 만든 책을 독립서점에 입고하기 위해 오갔던 거리,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연대가 마음을 덥혔던 독립출판물 축제, 자몽이의 죽음과 김치의 성장, 가족과 함께 갔던 밤의 카페와 영화관...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순간들이 이곳 브런치에 남아 있어요. 학창 시절 이후 일기를 거의 쓰지 않고 지냈는데, 뜻하지 않게 브런치가 저의 소중한 기록이 되어준 것 같네요. 그것도 귀한 마음을 나눠준 독자가 있는.. 제 삶의 순간들을 글로 함께 준 분들께 새삼 감사한 마음이 커지는 순간입니다. 어찌 보면 그분들이 제 삶의 역사를 지켜봐 준 목격자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가 저만은 아니었나 봐요.

최근 흥미로운 일이 있었어요. 제게 흥미를 불러일으킨 원인 제공자는 바로 친정 엄마와 아들 녀석이에요. 시작은 엄마였어요. 어느 날인가 엄마가 뜬금없이 제게 물었어요.

  "내 옛날 앨범이 어디 있더라?"

이사를 오면서 창고 구석진 곳에 묵혀둔, 엄마의 앨범을 찾는 것이었지요. 평소에 엄마가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묻고 말을 건네는 경우는, 간섭에 가까운 발언을 할 때 빼고는, 거의 없어서 저는 좀 놀랐어요.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고요.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워있지 않고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하는 엄마가 반가웠어요.



부리나케 창고로 달려가서는 쌓여있는 잡동사니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내 손길에 케케묵은 먼지들이 난리법석을 피워댔지만, 제 마음속에는 기대감 같은 것이 떠올랐어요. 얼른 앨범을 꺼내서 사진을 바라볼 엄마의 얼굴을 살펴보고 싶었거든요. 엄마의 표정이 어떨지 알 것만 같아서요.



엄마와 함께 앨범을 살펴보며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엄마가 우리 엄마가 아닌, 엄마 자신이었던 그때의 얼굴은 어찌 그리 빛이 나는지요.. 표정부터가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요. 거리낌 없는 환한 웃음, 자신감 넘치는 자세. 분명 엄마인데,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사진 속 모습들에 기분이 묘해졌어요. 즐거움과 찝찝함이 뒤섞인 감정이었달까요.


내가 방을 나온 이후에도 엄마는 오랫동안 앨범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꽤 불편한 자세였는데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요. 왼손에 사진 몇 장을 꼭 거머쥔 엄마는, 앨범 속 세상에 고요하게 빠져들어가 몸만 이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 같았어요. 아래로 향해 있는 엄마의 얼굴은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저는 엄마의 미소가, 아빠를 만나기도 전의, 싱그러웠던 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보였어요. 그러자 생각이 들더라고요. 홀로 머릿속에만 간직하지 말고, 언젠가 엄마를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이 순간을 나눌 수 있게 사진으로 남겨두자고.

그러고 얼마 후,

몇 년 간 쓰지 않던 폴더폰을 꺼내 충전을 하고 있는 아들램을 발견했어요.

  "쭈니야, 쓰지도 않는 폰은 왜 충전해?"

궁금해진 제가 물었어요.

  "응.. 갑자기 옛날 사진과 영상들이 보고 싶어서."

아들에게 '옛날'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일컬어요. 현재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들은 자기가 저학년이었을 적 남겨둔 추억들이 고팠던 모양이에요. 폴더폰 충전이 어느 정도 되자 아들은 잽싸게 폰을 켰고, 이내 화면 속 사진들을 훑으며 키득거리기 시작했어요.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저는, 아들의 웃음소리에 홀린 듯 곁으로 다가가 추억의 시간에 동참했지요.



자그마한 폴더폰에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할 모습들이 가득했어요. 망고와 두부가 오기 전 우리와 함께 살던 하늘이, 초롱이,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자몽이의 어렸을 적 사진까지요. 앵무 녀석들이 아이들의 옷깃을 파고드는 영상에서, 지금보다 더 앳된 딸램과 아들램의 목소리가 까르륵, 웃음소리와 함께 울려 나오며 제 마음 한 곳을 톡, 건드리던 순간, 아들 녀석과 함께 웃고 있었던 저는 금세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불현듯 너무 그리웠어요. 우리 곁을 떠난 반려동물과, 그 시절 아들램과 딸램의 모습이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카르페 디엠'이라는 표현을 제 인생의 좌우명처럼 껴안았지만, 이따금 과거로 회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로는 과거의 내가 지금의 상황을 버텨나갈 위로를 건네주고, 앞으로 나아갈 발걸음에 힘을 보태주기도 하잖아요. 일흔이 훌쩍 넘은, 몸이 아픈 엄마가 평온한 미소를 짓게 하고, 십 대의 아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등교를 앞두고도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것 모두, 과거의 엄마와 아들이 현재의 자신에게 부린, 기분 좋은 마술 덕분일 테니까요.



다시금 브런치에 오래도록 머물러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이 글 속에 살아있는 칠십 대의 엄마와 초등학생 아들의 모습도, 분명 언젠가는 제가 생의 무게를 견딜 힘이 되어줄 것이니까요.
제 몸의 당이 떨어질 때면 언제고 기꺼이 입 안에서 살살 굴릴 수 있는, 상자 속 달콤한 초콜릿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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