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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오렌지 Jan 24. 2023

성격 급한 INFP가 봄을 준비하는 법

농사에 무지한 농부의 딸은 대책이 없다

  [긴급재난문자]

"한파경보, 동파방지, 화재예방 등 피해없게 주의바랍니다"


 연휴 마지막날  올겨울 들어 가장 낮은 기온이 예상된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겨울과 달리 이번 겨울은 너무 겨울답다. 눈도 많이 오고, 기온도 영하권에 머물면서 냇물이 거의 한달 내내 얼어있다. 외출 할 때는 꼭 내복을 위아래로 세트로 입어야한다. 무자비한 가스비, 전기료의 인상소식에 집 안에서도 기모를 아래 위로  맞춰입고 있어야한다. 이사하고 첫관리비, 가스비 고지서가 날아왔다. 이 집을 계약할 때 관리비는 8만원 정도라고 했는데, 가스비를 제외하고도 14만 8천원이 나왔다. 볕이 들지 않아 거의 보일러를 틀지 않았음에도 가스비는 6만원이 넘었다.  카드값은 저번달의 3배가 나왔다. 우리는 아직 백수인데... 어쩐지 발목이 점점 더 시려온다. 이렇게 혹독하고 대책없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나는 봄에 심을 꽃을 상상한다.

 내가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기대한 것은 딱 하나였다. 송암집 빈 땅에 맘껏 원하는 식물을 심고 가꾸고 키울 수 있겠다는 것. 농사 지을 생각은 없지만 텃밭과 정원을 갖고 싶은 알 수 없는 마음, 나는 어쩔 수 없는 농부의 자식인가. 마트에서 사먹는 채소 종류만큼 심어놓고 맘껏 우리만의 마트이자 냉장고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텃밭을 꾸밀거면 유럽의 어느 작은 농장의 틀밭을 본따고 싶었다. 아이디어 핀보드를 뒤져 마음에 드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밭 사진을 모았다. 오이, 토마토, 브로콜리, 당근, 딸기 등등 여러 채소가 옹기종기 정원수 못지 않게 화려한 색들로 어우러져 있었다. 하늘 아래 같은 립스틱색이 없는 것처럼 채소들도 다 같은 초록색이 아니다. 문교 오일파스텔의 색 번호표를 빌려 말하자면, 상추는 227번의 연하고 약간 흰빛과 노란빛을 띄는 연두색이고, 파 줄기는 228번 진한 잔디같은 녹색으로 칠할 것이다. 케일은 299번 약간 어두운 청록색 쯤 될 것 같다. 겨자잎은 235번처럼 보라색과 갈색을 살짝 섞은 잎사귀에 225번 노란빛이 많이 섞인 녹색 줄기를 가졌다. 잎사귀 색만 해도 20가지 넘는 다양한 녹색이 있는데, 꽃까지 피우면 내가 가진 72가지 색 오일파스텔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흔히 농촌에서 보이는 일자로 길게 두둑을 만들어 비닐 멀칭을 하고 한 가지 식물을 주욱 심은 수익을 위한 밭이 아니라 정원처럼 여러 식물들이 골고루 조화로운 텃밭 사진들을 보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꽃밭같은 텃밭"

사진 속 식물들을 뜯어보니 허브와 식용꽃들이 같이 심어져 더욱 정원같은 분위기가 물씬나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우리집 밭에는 그 흔한 메리골드 한 포기 심어있지 않았다. 메리골드는 예쁜 꽃을 피우고, 그 꽃을 차로 우려마실 뿐만 아니라 해충을 쫓아주기까지 하는 쓸모있는 꽃인데 왜 여지껏 한번도 심지 않았을까. 메리골드 심는 김에 다른 허브도 심어서 향신료도 만들어 두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메모지에 심을 것들을 적어보았다. 

  오이, 양파, 대파, 상추, 방울토마토, 큰 토마토, 로즈마리, 페퍼민트, 메리골드, 강낭콩, 팥, 단호박, 대박, 애호박, 블루베리, 고수, 바질, 청양고추, 가지, 파프리카, 참외, 쪽파, 루꼴라, 겨자, 오크라, 공심채, 레몬밤, 파슬리, 샐러리...................

 시장 한 번 갈 돈으로 씨앗을 사면 일년 내내 풍족하게 먹겠지, 하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목록을 아빠와 동생에게 공개했다. 

 "파하하하하하하하"

아빠는 오랜만에 웃었다. 비웃음인지, 귀여워 웃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크게 웃은 아빠는 진지하게 말했다.

" 사 먹는게 더 싸~"

옆에서 같이 웃던 동생이 말했다.  

"이거 다 어디다 심을라구?"

"아 여기 빈 땅 많잖아. 집 앞에 심어도 되고. 내가 씨앗도 다 골라서 장바구니에 담아놨어."

아빠와 동생은 다시한번 웃었다.

"언제 모종 키워서 심는댜~ 4월에 저어기 모종 파는데 가면 다 있어~니가 먹고 싶은데 3,4개씩만 심어도 실컷 먹어" 

 나는 결국 장바구니를 다 비우고 허브류와 특이 채소만 다시 고르기로 했다. 쇼핑몰의 상세페이지를 보고 있자니 왠지 어디선가 본 라벤더 밭이 떠올랐다. 끝없이 펼쳐지는 보라빛의 향연, 향긋한 라벤더의 향, 아 라벤더 밭을 만들까. 마침 체험장 옆에 4천평정도 되는 밭에 해바라기를 심을지, 보리를 심을지 못 정하고 있던데, 라벤더는 어떠냐 물어볼까. 이번엔 라벤더밭 사진을 찾아봤다. 액정 속에서 라벤더향이 나는 것 같고, 스크롤하는 손 끝에 보랏빛이 물들것 같았다.  

 "아빠, 이거 봐봐. 예쁘지?"

"이게 뭐냐? 응, 예쁘네. "

"해바라기 말고 이거 심을까? 이건 팔 수도 있어. 그리고 다년생이여. 한 번 심으면 계속 꽃을 볼 수 있어. 절화로도 팔고, 말려서 포푸리로도 팔고."

"이건 꽃이 얼마나 핀댜?"

"많이 피겠지!"

"아니, 꽃이 얼마동안 피냐고"

"아~ 해바라기가 2~3달 이랬지? 이건 3월부터 11월 까지....아니네. 이것도 한 두,세달 피네."

"땅은?"

"저기 해바라기 심기로한 땅에 심으면 되지!"

"아니~ 이게 잘 크는 토질이 어떤거냐고"

"아~ 기다려봐봐. (검색 중) 이건 건조하고, 햋빛이 많이 들면 된대. 여기 봐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대"

"기온은?"

"우리 나라에도 라벤더밭이 있던데,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농부와 농사에 무지한 그의 딸이 간신히 대화를 나눴다. 그냥 심고 싶다고 냅다 땅에 심는다고 되는것이 아닌가보다. 더군다나 여기 간사지 땅은 염분이 많아 기를 수 있는 작물이 한정되있다. 이것저것 뿌려본 다음 결정한 것이 해바라기와 청보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일단 그 곳에 해바라기를 심고, 라벤더는 씨만 뿌려보기로 했다. 잘 자라면 그때 점점 늘려가보기로 했다. 

 300립짜리 라벤더 씨를 한 봉지 더 장바구니에 넣었다. 결제하려고 보니 어째서인지 모종으로 심을 작물을 뺐는데도 가짓 수가 그대로이고 총 결제금액은 늘었다. 목록을 보니 허브를 검색해서 쇼핑몰에 있는 허브를 거의 다 담은 것 같다. 그래 그렇다면 허브 정원을 만들자. 향긋한 허브가 작은 화분에 담긴것이 아니라 땅위에 소복하게 자라나면 얼마나 예쁠까. 

 주문한 종자들이 도착하자 식구들은 다시 한번 웃었다. 

"이게 다 뭐야!"

"봐봐, 심어놓으면 진짜 예쁘겠지?"

"어디다 심게?"

"아 여기저기 뿌려놓으면 클 애들은 크겠지."

"부추는 왜 샀어?"

"으잉? 그르게..근데 뭔가 특별하나 부추 같지 않아?"

"캣닢? 이건 뭐여?"

"이거 있어, 고양이들이 좋아하는거."

"아이고~그려, 한번 심어봐봐"

나는 당장에 모종판에 뿌릴 작정이었으나 날이 추워 싹이 안 틀거라는 전문가들 말에 일단 일보후퇴했다.

"이것도 다 때가 있는거여. 아무때나 하는게 아니라."

   딸기 농장 구석에 두면 잘 자랄것 같았는데, 딸기는 그렇게 높은 난방이 필요없는 작물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어쩐지 전에 이사하면서 잠시 맡겼던 몬스테라가 다 얼었더라니.

  전국엔 한파경보가 떨어지고, 관리사무소에서는 세탁기 사용을 자제해달라는 안내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부지런한 어느 농부가 일찌감치 논에 댄 물은 얼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는 벌써 풍성한 허브밭과 마트 신선 코너만큼 다양한 작물이 자라는 텃밭에서 로즈마리를 꺾고, 오이를 딸 준비를 하고 있다. 메리골드로 차도 내려 마시...아, 메리골드 주문을 안했네. 메리골드하고 또..나 샐러리도 빼먹었네, 그것도 추가해야겠다.


 이렇게 대책없는 무지한 예비농부는 한파 경보 속 난로를 쬐며 성급한 봄 준비를 해나간다. 지난 겨울은 춥지않았지만 길었다. 밤도 너무 길고, 휑한 나뭇가지도 유난히 쓸쓸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이 지났다는 것을 느낀 건 화원에서 만난 노오란 사랑목 분화였다. 겨우내 건조하고 추워서 고생하던 베란다 화분들에 생기가 도는 것도 그때서야 발견했다. 봄이구나. 왔구나. 그렇게 만난 봄은 조금 안심되었고 어쩐지 싱거웠다.올해는 조금 다르다. 난로불에 삼삼오오 모여 믹스커피를 나눠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아저씨들이 어쩐지 씨앗같다. 새해 인사하러 들른 친구네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12월이 12달 있었으면 좋겠어."

 겨울은 농촌의 겨울은 휴식이자 안락함이고 평안의 시간이다. 이 추운 날씨는 우리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는걸 아는 저 농부들이 이 씨앗같다. 나는 저 언 땅 아래 숨쉬는 생명들이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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