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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Oct 14. 2015

굿바이 런던 2

런던에서의 마지막 순간

글의 흐름상 전 편 '굿바이 런던 1'을 먼저 읽길 권장합니다 :)


호스텔에서 한 차례 소동 아닌 소동의 매듭을 짓고 파리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촉박한 시간 탓에 한 손에는 짐 한 보따리를 들고 다른 한 손은 캐리어를 끌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건 거의 달밤에 집 앞 탄천에서 파워워킹하는 수준인 것 같다. 덜덜덜 요란스레 뒷꽁무니를 따라오는 캐리어 바퀴소리가 유달리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오전에 미리 Victoria Coach Station(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까지 경로를 알아보지 않았다면 어쩔뻔했나 하는 마음으로 재촉한 발걸음이 다행히도 헤매지 않고 Oxford Street(옥스퍼드 스트릿)의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제 여기에서 버스만 타면 되는거다. 대충 시간을 계산해보니 이변이 없는 한 예약시간에 딱 맞게 도착할 수 있을거 같았다. 한숨을 돌리고 오이스터 카드(교통카드)를 미리 꺼내려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응? 외투 주머니와 그 안에 입은 자켓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손에 카드가 잡히지 않았다. '이럴수가, 설마 나 카드 잃어버린거야?'


침착해 침착해...


다시 한 번 내가 입고 있는 옷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져봐도, 메고 있는 가방을 탈탈 털어봐도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정말 시간이 없었다. 이러다 버스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파리는 커녕 여행 일정 자체가 꼬여버리는 거다.

런던에서 마지막 날이라고 파운드도 다 써버린 상태였다. 무엇보다 최악의 사실은 런던 버스는 현금을 받지 않는다.

식은땀이 났다. 이러다가는 파리행 버스를 놓칠 수도 있을거 같았다. 카드는 없는게 확실한거 같으니 그렇다면 Tube(지하철)을 타야하는 수 밖에 없다. 뒤적이던 손을 그만 멈추고, 아까보다 훨씬 더 조급한 마음이 되어 짐짝같은 캐리어와 함께 경보를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날 명동만큼 북적한 인파를 가로지르며 다시 파워워킹이 시작되었다.


어마어마한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거친 후 도착한 티켓 창구에서 1회권을 구매했다.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길 중 빅토리아 코치역으로 가는 길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안그래도 촉박한 시간에 길이라도 잘못 들어섰다가는 그대로 한국행이 될지도 몰랐다. Tube를 타러 가기 전까지 역무원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묻고 또 물으며 재차 확인하던 중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라는 마음으로 지나가던 한 남자를 붙잡았다.


"Excuse me!"


남자에게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으로 가려면 이쪽으로 가는거 맞아?"라고 물으니 손가락으로 한 쪽 에스컬레이터를 가르키며 "이쪽으로 쭉 가면 돼"라고 하였다. "Thank you!"

그 남자가 알려준 방향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쭉- 내려갔다. 정말 쭈우우우욱. 땅굴을 얼마나 팠는지, 마음이 급하니 런던에 있는 내내 한국보다 빨라서 좋다고 했던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엄청 느리게 느껴졌다.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가 지하에 다다르자마자 서둘러 파워워킹을 하려고 준비하려던 찰나,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전, 빅토리아 코치역 방향을 알려준 남자였다.

알고보니 나에게 방향을 살짝 잘못 알려줘서 다시 알려주려고 내가 내려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럴수가, 훈훈한데 착하기까지한 런더너라니..!

그 날 여행 다이어리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얼굴도 훈훈한데 이러면 내가 런던 떠나는 마당에 아쉬움이 더 남잖아ㅠㅠ] 라고.

정말 너무 고마웠다. 그 런더너의 친절한 배려가 아니었다면 지하철을 잘못타고 한참을 헤매다가 버스를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고마워하는 표정을 최대한으로 얼굴에 담아 "Thank You!!!"를 외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매너 넘치는 런더너 덕분에 무사히 Victoria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젠장, 내 눈 앞에 펼쳐진건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온통 계단이다. 뭐 어떡해, 들어야지. 버스를 놓치게 생긴 마당에 캐리어가 무거운건 문제가 아니였다. 몸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힘이 솓아 나오는거 같았다.

조금 버거운 캐리어를 낑낑대며 들고 한참을 올랐다. 아이고 서러워라. 계단은 끝이 보이질 않는구나. 속으로 한탄하며 열심히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불쑥 한 남자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May I help you?"라고 물었다. 정말이지, 그 순간 마블의 영웅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사람에게 나의 캐리어를 맡겼다.

계단 위까지 캐리어를 올려 준 남자에게 다시 한 번 빅토리아 코치역으로 가는 방향을 물었고, 자세히 길을 알려주는 그 남자에게 "Thank you sooo much!"를 외치고 다시 파워워킹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역 앞에서 조금 헤맬뻔 했지만 버스가 출발하기 전, 제대로 도착했다. 하, 혼이 빠져나간 기분이 이런걸까.


파리행 메가버스 티켓


창구에서 체크인을 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그때서야 런던에서의 마지막을 곱씹어 볼 수 있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우연히 받은 도움들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하지만 절대 작지 않은 도움들 덕분인지, 다른 곳보다 런던은 내게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기억된다.

누군가를 향한 조금의 배려, 조금의 친절이 때로는 생각보다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우연히 받았던 작은 친절들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 처럼 말이다.


THANK YOU LONDON, GOOD BYE AND SEE YOU AGAIN!



런 던 들 여 다 보 기





















처음에는 비트박스 퍼포먼스를 찍고 있었는데, 자꾸만 카메라를 돌리게 만든 댄싱머신 남자분!!! 덕분에 런던에서의 즐거웠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다음주부터는 파리편이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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