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방학'의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를 듣고
나는 주관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 어른이 멋있어 보였다.
모름지기 어른이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한참을 끊임없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 이슈니 정치니 하는 것에도 막힘없이 의견을 펼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제시와 빈을 휘저으며 한참 동안 자기 생각에 대해 얘기하던 비포선라이즈의 셀린느처럼! (셀린느는 멋있게도 9년 뒤 비포선셋에서 환경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실은 지금 비포선라이즈의 셀린느보다 나이가 많지만 이 나이를 먹어놓고도 내가 어른이라는 인지를 자주 못할뿐더러, 멋있는 어른도 물론 되지 못했다. 대신 나는 호불호가 강한 사람으로 생장했다.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도 좋아하는 문체의 글도 확실하다. 그래서 힙합이나 팝 같은 음악은 전혀 모르고 읽는 책이라곤 문학과 에세이뿐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타입도 확실해서 내 스펙트럼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싫어한다. 좋아하는 것이 많은 만큼 싫어하는 것들도 아주 많은 사람이 되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땐 그래도 나는 좋고 싫음이 명확하니까, 적어도 취향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다. 나의 올곧은 취향이 제법 맘에 들던 때도 있었다. 세상에서 마주하는 많은 것들을 나의 선호에 따라 나누다 보면 언젠가는 명확한 색깔을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뚜렷한 주관이 있음에도 하나도 멋지지 않은 어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념도 있고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말도 잘 하고 나처럼 호불호도 강한데 어쩐지 때때로 말이 통하지 않고 답답했다.
그런 어른들을 보며 지금까지 내가 쌓은 게 취향이 아니라 편협이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나는 안과에서 시야검사를 할 때가 제일 무서웠다. 반구의 통 안에서 불빛이 깜빡여도 버튼을 못 누르는 건 안 보여서가 아니라, 그 불빛이 반짝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늘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도 그렇게 바깥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좁아지기만 하면 어떡하나. 나의 분명한 호불호 체계가 나를 내가 동경하던 멋진 어른 대신 아집만 들어찬 고집불통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면 어쩌나.
막연한 두려움이 들 때 가을방학의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가 떠올랐다.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좋아하는 색을 물어볼 때
난 대개 오렌지색이라고 말하지만
내 맘 속에서 살아있는
내 인생의 색깔은 제 몫의 명찰이 없어
때로는 朱黃 때로는 등자 열매 빛깔
때로는 이국적인 탠저린이라 하지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 있어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어딘가 있어
가을방학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나는 좋아하는 색을 물으면 언제고 명확하게 주황색!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보라색도 갈색도 좋다 말하는 타인의 취향을 색깔 하나 못 고르는 애매함으로 치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얼마만큼 많은 빛깔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팔레트 위의 수천수만 가지 색 중 내가 좋아하는 색을 단 하나로 못 박으려 한 건 아니었을까. 분명 내가 보지 못하는 시야 밖의 색도 있었을 텐데.
편협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한다. 고집만 들어차 얘기를 나눌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유가 필요한 것 같다. 좋아하는 색깔을 말할 때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여유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당신이 등자 열매 색을 좋아하든, 탠저린 색을 좋아하든 나는 당신과 같은 색을 좋아한다 말할 수 있을 텐데.
가을방학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한다. 아마도 진짜 멋있는 어른은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을 여섯 자리 숫자로 쪼개어 언제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보단 샛노랑과 새빨강 사이에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이려나, 적어도 탠저린과 오렌지 사이쯤엔 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만치 취향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난 조금은 덜 편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