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일’의 ‘Useless’를 듣고
여우와 신포도 우화가 있다. 배가 고픈 여우가 나무에 달린 포도를 따먹으려 했으나 너무 높아서 닿지 않자, 저 포도는 분명 덜 익어서 실거야! 라며 포기 했다는 이야기. 어릴 때 이 우화는 일이 뜻대로 안 되었다고 해서 남 탓을 하면 안 된다- 뭐 이런 교훈을 주는 이야기였다.
끝까지 어떻게든 시도해서 결국 손에 얻은 포도가 너무나 달콤하고 맛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요즘의 나를 위로하는 건 안 되면 별로겠거니 하고 돌아서는 여우의 신포도적 마인드이다. 살다 보니 높은 나무에 달린 포도를 바라만 볼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남루하게 현실의 찌꺼기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면 늘 남들은 잘 사는 것 같고 행복해 보인다.
못난 질투와 시기가 고개를 내밀 참이면 신포도를 떠올린다. 행복하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 누구나 자기 몫의 고난과 불행이 있을 텐데 저 사람의 삶이라고 다를까. 다른 사람의 행복이 그닥 특별하지 않다는 건 나의 불행도 일반적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이라는 건 설사 이 고통이 나에게만 무거운 것 처럼 느껴진다 해도 어떻게든 지나갈 일이라는 뜻이 되니까.
그래서 남의 포도를 실거라 지레짐작하는 이 못되먹은 심보가 삶을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Useless를 듣는 마음도 그렇다.
이 쓸모없는 놈 쓸모 없어지면
나는 하나도 쓸모없는 놈인가요
나 필요 없어지면
필요 없는 놈인가요
그럼 난 살아갈 가치도 꿈도 없는 놈인가요
정준일 <Useless>
쓸모 없는 인생, 필요 없는 인생, 살아갈 가치도 꿈도 없는 인생. 바닥에 가라앉아 도통 떠오르지 못 하는 이 슬프고, 처절하고, 가여운 노래를 들으면 마찬가지로 나까지 침잠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정준일은 본인이 가장 음악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던 시기에 이 노래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 노래와 앨범을 통해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없이 우울하고 가라앉기만 하는 이 노래는 어떻게 위로의 기능을 수행할까.
아마도 그 위로는 보편성에 있을 것이다. 지나간 노래가 다시금 회자되어 널리 사랑 받고 불려졌을 때, 그래서 아마도 누군가는 그의 성공을 여우가 신포도를 올려다보듯 부러움과 시기를 담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역설적으로 본인이 쓸모 없음을 탓하며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우울한 노래를 썼다. 마치 내 포도는 사실 하나도 달지 않다고 스스로 일러 말해주듯.
"당신도 그래? 나도." 하는 보편성은 불행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이 연대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덜 외롭다. 완전한 행복도 완전한 불행도 없으며 우리는 이 굴레를 공평하게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연대를 나는 이 노래에서 느낀다. 그리고 바란다. 그가 덜 힘들고 덜 외롭길. 우리가 덜 힘들고 덜 외롭길.
그래서 나는 나의 신포도 같은 못된 마음씨를 멋대로 투영하여 이 우울한 노래를 좋아한다.
조금 더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면- 뛰어서 닿지 않는다면 나무를 기어 올라서라도 열매를 쟁취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니면 설사 닿지 않는다 하더라도 멋대로 잘 익은 달큰한 포도를 실거라 넘겨 짚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뭐가 조금 달랐을까 싶기도 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정도 깜냥의 사람인걸.
Useless가 수록된 Underwater 앨범의 가장 마지막 곡은 We will meet again이고, 이 노래에선 같은 가사가 반복된다.
It’s all right.
It’s all right.
It’s all right.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쓸모 없음 불안 우울 아픔을 세 곡에 걸쳐 잔뜩 토로하다 결국엔 그렇지만 그럼에도 괜찮다 모두 잘 될거야 말한다.
마냥 긍정에 가득찬 위로보단 정준일 식 비관의 위로에 한숨 한 번 쉬고 일어날 수 있다. 공평하게 우리를 스쳐가는 불행에 내멋대로 동질감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