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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옐옐 Nov 07. 2017

내가 눈으로 듣는 노래

'음악을 읽다'에 다녀와서

지난 주말엔 음악을 읽다 라는 공연에 다녀왔다. 가을방학 윤종신 안코드 세 뮤지션이 그들의 음악과 가사에 대해 얘기를 하고 소설가 김영하가 글쓰기에 대해 얘기하는, 콘서트 같기도 강연회 같기도 한 것이었다.


나는 노래를 들을 때 가사에 특히 더 집중하는 사람이어서 스스로를 활자형 리스너라고 칭하곤 하는데, 그러니까 '음악을 읽다'라는 이 공연의 타이틀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 명의 뮤지션이 들려주는 노래, 한 명의 소설가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는데 문득 주말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정말로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겪으면서 여기저기 몸의 구조가 변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상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음악이 있었다,라고 할까, 그때마다 그 장소에서 나는 뭔가 특별한 음악을 필요로 했다.

… 음악은 그때 어쩌다 보니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걸 무심히 집어 들어 보이지 않는 옷으로 몸에 걸쳤다.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 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중에서


내가 노래를 듣는 마음 그리고 소설을 읽는 마음을 이렇게나 잘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본인의 언어로 나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준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음악에는, 그리고 소설에는 정말로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나는 많은 뮤지션들의 노래에 들으며 나의 무게를 그들의 음악에 실어 나의 흩어짐을 간신히 막았다.


올해는 많은 날들을 가을방학의 '사하'에 기대어 매달려 있었다. 대롱대롱 붙들고 간신히 떨어지지 않으며 나는 정말로 이 음악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하는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 중 최저기온을 기록한 곳이라고 한다. 북쪽 지방에서 차가운 공기가 흘러와 추워지는 것처럼, 차가운 손을 가진 사람이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의 손을 잡으면 따뜻했던 손 마저 식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노래는 또다시 차가워진 손을 잡고 떨다 파래진 입술로 말한다. 그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댈 놓지 않는다고. 이런 사람과 이런 사랑이 있다는 건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조금 위로가 되어서 나의 차가워진 손을 내려다보며 덜 춥다 느낄 수 있었다.


'눈으로 듣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내가 듣는 노래와 내가 좋아하는 가사에 대해 별것 아닌 감상을 남기며 나는 하루키의 말마따나 음악의 그런 실용적인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슬픔이나 고통도 모두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그걸 타인이 만든 음악을 통해 위로받았듯, 내가 노래를 듣고 이런 마음을 느낀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과 글로써 조금이나마 공유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고.


몇 마디 가사로 내 추위를 달래는 가을방학과 몇 단락의 문장으로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건데,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하루키처럼 별난 재주는 없지만 말이다.


그네들의 노래가, 그네들이 쓴 글이 나에게 이런 실용적인 치유와 위로의 역할을 해준다는 고마움이라도 어줍잖게나마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음율과 문장에 빚을 참 많이도 진 인생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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