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개된 데블스플랜 시즌2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을 수 있습니다)
1.
나는 <더지니어스>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피의게임>, <데블스플랜> 류의 보드게임 기반의 두뇌 싸움을 하는 서바이벌 예능을 좋아한다.
이런 예능들에서 하는 게임들은 보드게임에 불과하지만, 그 게임에 참여하고, 승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많은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예능은 그 특성상 "나는 머리 회전으로는 한가닥 하는 사람이다."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이 출연한다. 연예인이나 방송인이라면 학벌이 좋거나 평소 머리가 좋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출연을 하고, 그 외에는 바둑이나 포커 프로 선수들, 일반인들 중에는 전문직 종사자나 기재로 유명한 사람들이 출연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두뇌 회전이 뛰어날 것으로 추정되는' 인재들이 모두 게임을 잘할까?
내가 저 프로그램들에 출연한다고 그들보다 더 잘할 것이라는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애청자로서 평가를 한다면 놀랍게도 대다수의 참가자들은 그들이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거둬온 뛰어난 성취에 비해 그다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흥미로운 것은 대다수의 참가자들이 별다른 활약을 못하는 현상은 게임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좀 더 포맷이 오픈된 형태인 <피의게임>보다는 <더지니어스>나 <데블스플랜>처럼 포맷이 상대적으로 닫혀 있고 본격적인 보드 게임 위주로 게임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지니어스>나 <데블스플랜>에서도 프로 바둑 기사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유독 활약을 못하는 경향 또한 존재한다. 공부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연예인 참가자들이 통상적으로 플레이를 잘하는 경향이 있으며, 포커 선수들은 딱히 나쁘지 않으나 그들은 특유의 강한 단점(개인주의, 강한 캐릭터, 공격성)으로 인해 큰 활약을 펼친 사람이 거의 없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2.
나는 개인적으로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성취'에 대한 오해이다.
한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룬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최고 수준의 지성을 지닌 사람이 수년 이상 한 가지 분야에 천착해야만 최고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들어온 이야기 중에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바로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한 가지 분야 또는 한 가지 문제를 위해 노력하여 성취를 이루는 능력과 수많은 카메라가 보고 있는 낯선 환경에서 몇 시간 안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게임을 잘 해내는 것과는 그리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둔 사람은 반대로 자신이 성공을 거둬온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하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이게 바로 두 번째 이유인 '게임에 대해 정의'하는 능력의 부족이 발생하는 이유이다.
3.
'게임에 대한 정의'는 전략을 수립하고, 해야 될 일을 정리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게임, 같은 TV 프로그램 일지라도 내가 '게임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될지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내가 친구들과 모여서 '마피아'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마피아 게임은 연기를 잘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게임이라고 정의할 경우 나는 최선을 다해 연기를 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반대로 내가 마피아 게임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유대를 만드는 게임이라고 정의할 경우 나는 정보 공유와 신뢰할 수 있는 동료를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렇게 좁게는 게임 내부에서부터 시작하여 넓게는 게임 외부에까지 내가 참여하고 있는 게임에 대한 정의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온라인을 타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방송일 경우 나는 방송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갈 수 있을지까지 신경을 써야 된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방송에서 줄기차게 거짓말만 할 경우, 눈앞의 게임에서는 승리할 수 있을지라도 실제 비즈니스에는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4.
이처럼 지능형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좁게는 게임 내부에서부터 넓게는 게임 외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에서 게임에 대한 정의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게임에 대한 정의에 실패하곤 한다.
예를 들어, <더지니어스>나 <데블스플랜> 등을 연출한 정종연 피디의 프로그램들은 통상 프로그램 시즌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게임은 그게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도 결국 그 의도는 "편을 만들어라" "누가 나랑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시즌 초반부터 개인이 혼자 룰을 파훼하여 엄청난 활약을 펼칠 수 있는 게임은 주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사람이 많을 때는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통해 재미를 제공하고, (초반에 옥석을 가린 후) 사람이 적어질수록 한 사람에 의한 능력으로 재미를 제공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다수의 참가자들은 처음부터 명시적인 게임의 규칙에서 허점을 찾아보려고 애를 쓴다거나,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의논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나선다. 이것은 '이 프로그램은 서바이벌 게임이다' 라거나 '제작진의 의도를 파악해서 우승하는 게임'이라는 정의 대신 '방송 한 회차라도 더 살아남는 게임' '방송에 어떻게 보이든 간에 일단 살아남는 게임'이라는 정의에 더 걸맞은 행동이다.
어떤 참가자는 겉으로는 자신이 지능형 서바이벌 게임의 전설적인 참가자들이었던 홍진호나 장동민처럼 시청자들 앞에서 자신의 뛰어난 게임 능력을 자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참가자는 이 게임의 정의를 '나의 뛰어난 능력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게임'으로 정의한 것일 것이다.
자신이 참가한 게임을 그렇게 정의한 참가자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조금 튀더라도 게임에 대한 필승법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이끌거나,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있는 극한의 상황(예를 들어, 탈락자를 가리는 '데스매치' 같은 상황)에 자진해서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참가자들은 그 사람이 우승자건 아니건 간에 극단적인 상황에서 능력을 보여준 사람이거나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기발한 전략을 제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의게임 시즌2> 같은 경우에는 우승을 해도 우승자가 누군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뽐내고 싶다는 사람이 정작 게임에서는 다수의 인원 사이에 묻어가는 전략을 사용한다거나 위험한 상황은 최대한 피해 가려는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참가하는 게임의 정의를 잘못 내렸거나, 아니면 전략을 잘못 선택한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라는 뜻일 것이다.
장동민이 다른 참가자들과 차원이 다른 능력을 보인 지점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물론 그는 계산 능력이나 암기 능력도 뛰어났지만, 그는 무엇보다 프로그램과 게임에 있어 올바른 정의를 하고 그에 맞춰 전략을 찾는 능력,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는 능력, 필요한 경우 얼마든지 리스크를 가져가는 능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5.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게임에 대한 정의에 실패하는 모습은 무언가 한 분야에 더 오랫동안 집중한 사람일수록 심하며(바둑 기사, 전문직종 종사자 등) <피의게임> 참가자들보다 <더지니어스>나 <데블스플랜>에 참가한 사람일수록 더 실패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피의게임>이라는 프로그램은 애초부터 명시적인 룰이 그리 빡빡하지 않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보드게임으로 승부를 겨루는 것의 중요도나 게임의 난이도는 다른 프로그램들보다 낮으며, 해당 프로그램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참가자들을 몰아넣고 게임 외적으로 시청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의 비중이 훨씬 높다.
당연히 참가자들 또한 명시적인 룰에 집착하기보다는 무슨 수를 쓰던지 생존을 하고 편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참가자들 스스로 명시적인 룰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며 스스로 창의적인 게임의 정의를 내리려고 노력한다. (<피의게임> 참가자들은 게임보다 오히려 무언가 파괴하거나 싸울 준비를 더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다.)
<더지니어스>나 <데블스플랜>, <더타임호텔>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명시적인 룰이 훨씬 빡빡하다. 그리고 보드게임의 중요도나 게임의 난이도가 훨씬 높다. 그렇다 보니 참가자들이 명시적인 규칙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규칙 외적으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인지적으로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둔 사람들이 (속된 말로 머리 좋고 공부 좀 해본 사람들이) 큰 함정에 빠지곤 한다. 대다수의 머리 좋고 공부 좀 해본 참가자들은 보통 규칙에 기반하여 무언가를 이뤄왔던 사람들이고, 초반부터 튀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좋다는 생각도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학문적인 공부만 열심히 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지능형 서바이벌 게임에서 돋보이는 모습을 보인 바둑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수 읽기 능력과 암기 능력은 바둑판 위에서는 엄청난 능력일지 몰라도, 현실 세계에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일반인보다 떨어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나마 좀 활약을 하는 경우는 포커 선수 출신의 참가자들이다. 포커 게임 또는 카드 게임은 룰이 한 가지인 것 같지만 사실 그 안에서도 파생되는 종류의 게임이 엄청나게 다양하다. 이들은 계산과 암기 능력,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능력을 다양한 게임에 적용하는 것에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들의 단점은 포커라는 게임 특성상 엄청난 자신감과 개인 능력을 지니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니 게임에 대한 이해보다는 공격적이고 독불장군적인 성향이 강해서 집단에 융화되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보면 이들 또한 본인들이 참여하는 게임이 여전히 보드게임에 국한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오류를 범하여 실패를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
이러한 '게임에 대한 정의'가 승부를 좌우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직장인>라는 게임에 대한 정의에 실패하는 경우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직장인>이라는 게임은 유능함과 똑똑함을 겨루는 게임이 아니다. <직장인>이라는 게임은 고객(외부 고객, 내부 고객(상사, 동료 등))을 만족시키는 게임이다. 그러니까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빨리 승진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해서 빨리 잘리는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늘 미스터리하게 여기는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자리까지 갔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빨리 <직장인>이라는 게임의 정의를 다시 살펴봐야 된다.
대기업에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회사 밖에 나가면 바보가 되는 것도 대게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 회사 내부에서 인정을 받고, 업무를 성공시키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요리조리 피해나가는 게임은 회사 밖에서 스스로 자기 사업을 성공시키는 게임과 겉으로 보았을 때는 동일한 게임인 것처럼 보여도 전혀 다른 게임이라고 봐야 되기 때문이다.
같은 토익 시험에 참여하더라도 내가 참여하는 게임을 '공무원 지원 등을 위해 단기간에 최소한의 지원 자격만 따는 것'으로 정의할 것인지, '최대한 높은 점수를 따는 것'으로 정의할 것인지, '영어를 잘하기 위해 도전하는 것'으로 정의할 것인지에 따라 써야 되는 방법이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음식점을 차리더라도 내가 참여하는 게임을 '맛집 경진대회'로 정의할 것인지, '빠른 포만감을 제공하는 기계'로 정의할 것인지, '경험을 파는 곳인지'로 정의할 것인지에 따라 써야 되는 방법이 다르다.
더 나아가 좀 더 거창하게 생각해 보자면, 기업 또한 해당 기업이 업(業)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승부 또한 달라질 수도 있다. 딜로이트에서 발행한 <격변의 패턴>이라는 책에서는 미국 뉴욕의 1901년 마차가 가득한 도로와 1913년 자동차로 가득한 도로를 비교하며 마차 용품을 만들던 회사들이 자신들의 업을 '더 좋은 마차 용품을 만드는 것'으로 정의했다면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었어도 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운송 관련 용품을 만드는 것'으로 정의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7.
게임에 대한 정의가 바뀌면, 성공을 위한 전략이 바뀌고, 전략이 바뀌면 해야 될 일이 바뀐다.
자신이 참여하려고 하는 게임을 어떤 게임으로 정의할 것인지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소모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잘못된 시스템과 잘못된 프로세스를 반복해 봤자 얻는 것은 잘못된 값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참여하는 인생이라는 게임과 투자라는 게임은 어떻게 정의해야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