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 ‘최초의 KSPO-DOME 입성’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일까.
우리는 늘 그 경계로 세상을 구분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 구분이 아무 의미도 없어지곤 한다.
수만 명이 한 공간에서 숨을 고르고,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그날이 바로 그랬다. 눈앞에 선 건 버추얼 아이돌이었지만, 내 심장은 현실보다 더 뜨겁게 뛰고 있었다. 그 무대는 ‘가상’이라는 낡은 단어를 넘어, 우리가 함께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버추얼 아이돌이 콘서트를 한다고? 결국 스크린에 영상 틀어놓는 거 아니야? 집에서 보는 거랑 뭐가 달라?”
많은 이들이 이렇게 묻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상 관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가 지닌 ‘함께 있음’의 방식이 얼마나 다채로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굳이 비싼 티켓을 사고, 긴 줄을 서고, 수많은 인파 속에 몸을 맡기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음악을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모인다. 같은 노래를 합창하는 그 순간의 떨림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음을, 함께 있다는 감각을 체험한다.
버추얼 아이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프라인 무대 위에서 관객과 동시에 호흡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픽셀의 집합이 아니었다. 노래하고 춤추며 팬과 감정을 주고받는 그 자리에 선 것은 분명히 ‘아티스트’였다. 무엇보다 특별한 건 그들이 팬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는 점이다. 팬들의 환호와 함성, 구호는 곧바로 무대 위에 반영되고, 아티스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되돌려준다. 응원봉의 파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무대에서의 즉각적인 반응은 화면을 넘어선 교류였다. 그 즉시성 속에서 ‘가상’은 더 이상 차가운 픽셀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로 변모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공연을 ‘본 것’이 아니라, 함께 호흡하며 서로의 시간을 살아냈다는 경험을 얻는다.
사람들은 종종 ‘버추얼’이라는 단어 앞에 한계를 먼저 붙인다. 진짜가 아닌 것, 현실의 대체물, 언젠가 꺼질 CG. 하지만 이번 무대에서 내가 본 것은 정반대였다. 플레이브는 ‘버추얼’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과 가상을 이어내며 새로운 예술적 정체성을 창조했다. 중요한 건 실재하는 몸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얼마나 진정성 있게 전달되느냐였다. 그 순간 팬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버추얼’과 ‘리얼’의 경계는 의미를 잃고 새롭게 탄생한다.
“가짜 아니야?”
“사람도 아닌데 왜 울고 웃어?”
버추얼 아이돌은 늘 이런 편견에 맞서야 했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낯선 형식으로 세상을 흔들어 왔다. 전자악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진짜 음악이 아니다’라는 비난이 있었고, 애니메이션이 예술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유치한 그림’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흐름은 늘 ‘진짜’라는 단어의 경계를 다시 쓰며 우리 곁에 남았다.
플레이브의 무대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단순히 ‘최초의 KSPO-DOME 입성’이라는 기록을 넘어, 예술과 기술이 결합한 새로운 시작점이었다. 특히 그 장소가 KSPO-DOME이라는 점은 더 큰 의미를 남긴다. ‘입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곳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수많은 아이돌이 꿈꿔온 무대, 일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말도 안 된다고 했던 무대, 버추얼 아이돌은 결코 서지 못할 거라던 편견을 깨고, 플레이브는 그곳에 올라섰다. ‘말도 안 되는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는 눈앞에서 아이돌의 새로운 정의가 쓰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것은 단순한 성취가 아니라, 시대가 바뀌었다는 증거였다.
이번 콘서트에서 플레이브는 팬덤을 ‘중력’에 비유했다. 버추얼이라는 몸을 입고 무대에 서 있는 그들을 붙잡아 주는 힘, 흩어질지 모르는 존재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 그것이 바로 플리(PLLI)였다. 그 표현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결국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언제나 ‘중력 같은 마음’이다. 팬들이 있기에 아티스트는 무대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존재할 수 있고, 아티스트가 있기에 팬들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중력이 되는 것. 그 안에서 아이돌의 본질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한다. 가짜라고, 결국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을 들을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눈앞의 몸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태도와 서로를 묶는 마음이 진짜라는 것. 가장 많은 편견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가장 거침없이 자신들의 길을 걸어온 것. 가짜라 불릴수록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중력처럼, 그들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끝내 자신들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
또다른 한 가지로, 버추얼 아이돌의 가장 큰 의미는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같은 순간에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떨림을 공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특별하다. 눈앞에 서 있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을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목소리와 노래, 세계관과 이야기를 통해 실재를 증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중요한 건 ‘실재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향해 보내는 시선,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태어나는 관계다. 실제로 콘서트장에 앉아 플레이브의 무대를 본 순간, 확신했다. 관객들의 환호와 눈물, 합창은 모두 ‘진짜’였으며, 그것만으로 충분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예술이란 반드시 ‘육체를 가진 사람’에 의해 완성된다는 공식을 넘어가고 있다. 버추얼 아이돌은 단순히 가상 존재가 아니라, 기술과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공동 창작물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애니메이션 같은 형상이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실제 인간이 있다. 버추얼 아이돌을 현대 기술의 집합체라고 부른다고해서 인간이 배제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인간이 관여한다. 아티스트의 목소리를 담는 보컬, 무대를 설계하는 제작진, 팬들과의 관계를 설계하는 기획자. 버추얼 아이돌은 여러 인간의 창작과 기술이 한데 모여 만들어낸 예술적 총체다. 결국 ‘버추얼’은 껍데기가 아니라, 인간의 예술적 표현이 입은 또 다른 옷일 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다.
무엇보다 이번 무대에서 다시금 오프라인 공간의 힘을 느꼈다. 영상으로도 볼 수 있었지만, 굳이 몸을 움직여 현장에 간 이유는 하나였다. 같은 무대를 바라보며 함께 울고 웃고, 응원봉을 흔들며 한 목소리로 노래할 때, 우리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동료였다. 세상이 아무리 온라인화되어도 인간은 끝내 오프라인으로 연결되고 싶어 한다. 플레이브는 그 본질을 건드렸고, 결국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순간을 선물했다.
K-POP은 이미 세계적인 문화 현상이다. 수많은 스타들이 빌보드를 점령하고, 전 세계 팬들이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른다. 그 위상은 자부심이지만, 동시에 부담이기도 하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이돌은 소모되고, 팬덤은 때로 과열되며, 산업은 상업성과 진정성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래서 K-POP을 향한 시선에는 늘 염려가 함께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케이팝의 힘을 믿는다. 그것은 단순한 음악 산업을 넘어, 관계와 서사, 그리고 새로운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버추얼 아이돌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기존 아이돌이 겪는 육체적 한계를 넘어, 또 다른 방식으로 팬과 이어진다. 이것은 케이팝이 가진 확장성의 증거이자,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유연하고 미래지향적인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의 KSPO-DOME 입성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징표다. 현실과 가상이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예술과 관계의 형태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팬들은 더 이상 ‘버추얼’이라는 단어에 갇히지 않는다. 그들은 아티스트로서 사랑받고, 존재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날의 콘서트에서, 나는 분명히 느꼈다.
버추얼이라는 이름 너머, 그들은 이미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아티스트였음을.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같은 시공간을 살아내며, 진짜로 서로의 곁에 있었다.
다른 궤도였지만 하나의 궤도로 이어지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함께였다.
우리를 묶어주는 힘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
플레이브가 말한 것처럼, 팬들은 그들의 ‘중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우리 또한 서로에게 중력이 된다는 것을.
가짜라 불려도, 편견의 시선이 쏟아져도, 끝내 서로를 붙잡아주는 힘.
그 힘이 있는 한, 이 무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이자,
우리가 여전히 서로를 붙잡으며 이 시대를 살아낼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