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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14. 2024

신도 이민자도, 국가를 섬겨야 한다

[책을 읽고]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5)

종교 - 이제 신이 국가를 섬긴다


종교에 대해서도 민족주의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즉, 인류 문명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그 역할을 했다는 말 말이다. 그러나 하라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통 종교는 기술과 정책 문제와는 대체로 상관이 없다. 반면에 정체성 문제와는 상관이 아주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대개 해법이 되기보다 문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156쪽)


다시 말해, 종교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효과는 없었지만 기술과 정책 문제에 대해 조언이라도 하던 예전(예컨대, 기우제)과는 달리, 이제는 종교에 그런 문제를 물어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조차 없다. 


그래서 종교는 정체성 문제에만 집중하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종교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다. 바로 민족주의다. 싸워서 이길 공산이 없는 종교는 민족주의 꼬붕이 되기로 결심했다. 부제에서 말하듯, 이제 신이 국가를 섬긴다. IS의 사례처럼 무장 단체를 국가로 포장하거나, 제국주의 일제의 사례처럼 폭력배 집단의 두목을 신이라 치장하는 데 사용된다.


"내가 말했지. 죽는 게 낫다니까."


이민 - 더 나은 문화를 찾아서


앞서 문명의 충돌 같은 것은 없고,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문명을 공유하고 있으며, 충돌은 사소한 차이에 있다고 말했다. 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가 바로 이민이다. 누군가 이민은 발로 하는 투표라 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감행한다.


누군가는 이민자가 수용국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수용국이 이민자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등장한다.


이민 논쟁을 벌일 때 우리는 모든 문화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할까, 아니면 어떤 문화는 다른 것보다 우월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177쪽)


하라리의 생각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 생각해 보자. 이민은 발로 하는 투표라 했다. 적어도 이민자는 모국의 문화에 대해 새로운 나라의 문화를 더 좋아한다는 투표를 한 것이다. (앞서, 투표는 판단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라 말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화가 더 나은 문화라고 볼 여지가 분명히 있다. (멋진 신세계와 같은 분명한 예외가 있지만,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민이라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문화에는 격차가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성을 그 자체로 찬미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도 인정한다. 다양성을 측정하고 등급 매기는 것보다는,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평화롭다. 그러나


인간의 다양성은 요리나 시에서는 위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마녀 화형이나 영아 살해, 노예제를 두고 글로벌 자본주의와 코카콜라 식민주의의 침략에 맞서 보호돼야 할 매력적인 인간적 특이성이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179쪽)


이는 문화에 우열이 존재한다는 듯한 뉘앙스로 들린다. 그러나 곧이어, 하라리는 <온화국>과 <냉대국>의 비유를 들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거부할 만한 문화도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맞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틀린 문화가 적어도 아직은 존재한다. (<삼체>에서 그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면, 결국 문화는 수렴할 것이라는 미래 전망은 상당히 강력한 설득력이 있기는 하다.)


문화에 우열이 있다는 주장 자체는 타당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문화의 우열성을 가지고 개인을 판단하는 데 있다.


문화주의자의 주장에서 최악의 문제점이라면, 통계를 기반으로 한 주장을 가지고 개인들을 예단할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184쪽)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점이라면, 생각할 거리를 아주 많이 던져준다는 데 있다. 이민이라는 문제에 대해 이만큼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이민 찬성 또는 반대라는 입장을 일단 정해놓고 논리를 짜맞추기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결론


2부를 다시 요약해 본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어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공동체가 약화되었다. 그래서 공동체를 찾기 위해, 다시 건설하기 위해 모두 분투한다. 그런데 공동체라는 것은 경계가 있는 법이다. 그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문명일까, 민족국가일까, 종교일까, 아니면 문화일까?


사람들은 문명의 충돌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모두 한 문명이다. 민족주의는 역사 발전의 단계에서 제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지구적 정체성에 그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야 한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인데, 종교는 인류 역사 내내 문제를 만들었을 뿐, 해결책을 제시한 적이 없으니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문화는 어떤가? 이민 현상을 보면, 다양성의 이름으로 모두를 포용해야 하는 문화라는 개념에는 어떤 우열이 존재하는 것 같다. 마녀 화형이나 영아 살해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열등한 것이 분명한 문화의 사례다.


류츠신의 <삼체>를 보면, 미래의 지구인들은 오늘날보다 더 통일된 문화 속에서 사는 것 같다. 현재의 추세를 보면 당연해 보인다. 류츠신처럼 지구를 단지 우주의 한 점으로 볼 수 있는 거시적 시각을 동원할 수 있다면, (하나뿐인) 지구인 문명은 그런 열등한 문화를 지우고 미래로 나아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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