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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19. 2024

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54. 선택자들

하민서의 손끝에 나타난 얼음 조각들이 날아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날아간 얼음 조각들은 소현배의 시신에 박혔을 뿐이다.


균형을 잃은 소현배를 향해 달려든 이준기는 오캄과 카데쉬를 그의 등에 찔러 넣고,

두 차례 연속으로 마나 폭발을 시전했다.

구원자를 상대로 하는 스킬은 절반의 대미지밖에 입히지 못한다.


그러나 3초 남짓한 시간에 집중된 폭발적인 대미지는 강력했다.

소현배는 뭔가 스킬을 쓰려 했지만, 카데쉬의 효과가 발동해서 그의 스킬 시전을 끊었다.


하민서는 시체에 날아가 박히는 얼음 조각들을 황망하게 거두어들였다.

앞으로 뻗었던 손을 거둬들인 하민서가 뻘쭘하게 물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쓰러진 소현배를 내려다보던 이준기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니, 잘하셨어요. 조금만 더 늦으셨더라면, 민서 씨를 다음 타깃으로 삼아야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등골에 오싹함을 느끼면서 하민서가 한 걸음을 뒤로 디뎠다.


“네?”

“아니, 이젠 됐어요. 한 라운드에 둘이나 죽이는 건 너무하죠.”

“어… 그게…”

“죽는 사람한테도, 죽이는 사람한테도 못 할 짓이잖아요?”

“준기 씨, 미안해요.”

“아니에요. 민서 씨는 그냥 숨어있을 걸 그랬어요. 결국 문아린을 찾는 게 아니고 소현배를 잡는 꼴이 되어버렸잖아요. 우리 계획, 기억해요?”


미션 종료 알림 메시지가 떴다.


- 두 번째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아주 잘하셨어요! 두 명이 거의 동시에 쓰러졌네요. 피바다를 보여주세요! 데스매치는 역시 이런 맛이 있어야죠.


이준기에게는 추가로 레벨업 관련 안내 메시지가 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주, 준기 씨! 두, 두 명이라뇨?”

“거의 같은 시간에 어딘가에서 다른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완전히 동시에 죽었다는 거예요?”

“아뇨, 그럴 리가요. 한쪽에서 미션이 클리어되더라도, 그 시점에서 진행 중이던 전투는 계속하게 놔두는 거겠죠. 양쪽 전투가 모두 끝난 다음에 안내 메시지를 내보내고요.”

“그, 그럼 또 누가 죽은 걸까요?”


하민서는 1라운드에서 마상욱이 죽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누가 죽었는지, 알림 메시지가 나오지 않으니 당연하다.


누가 죽었는가 하는 정보도 중요한 정보다.

서로를 적대하는 이런 포맷의 싸움에서는 얼마든지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안내 메시지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모든 걸 마치 게임처럼 즐기고 있는 건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방정맞은 신들이라도 있다는 건가?’


이준기에게 다음 미션 선택 화면이 떴다.

‘멋진 신세계’를 선택하면 이제 본격적인 배틀로얄을 벌이게 되고,

‘고공 침투’를 선택하면 원래의 목표, 즉 ‘오크 사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준기는 재빨리 ‘고공 침투’를 선택했다.

그러나 소용없다는 것, 알고 있다.

먼저 클릭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이준기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저쪽 승리자도 같은 선택을 해야만, 오크 사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준기 씨, 다음 미션 선택했나요?”

“네. 오크 사원으로 진입하는 미션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민서의 목소리에 의심이 묻어 있었다.


“아직 저쪽이 선택을 하지 않았어요. 저쪽도 나와 같은 선택을 해준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오크 사원으로 진입해서 몬스터를 상대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만약 저쪽이 다른 걸 선택하면요?”

“둘 다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서로 싸워도 되고, 협력해도 되는 거죠. 뭐, 주최 측 마음대로겠지만.”


예감이라고 말은 했지만, 아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보다, 미션을 동시에 클리어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누구인지, 어떤 선택을 할지, 기다렸다.

잠시 후, 평소와는 다른 불쾌한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두 번째 미션을 클리어한 두 명의 선택이 갈렸습니다.

- 각각 다른 걸 골랐다는 얘기죠. 별일 다 봅니다.

- 이럴 땐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시죠?

- 둘 다 합니다!

- 선택은 여러분의 몫!


이준기는 하민서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역시, 나쁜 예감은 틀리질 않죠?”


알림 화면이 꽉 차게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주석과 이준기가 선택한 각각의 미션 내용.

하민서는 긴 설명을 읽으며 쩔쩔맸다.


“준기 씨, 이게 무슨 말이에요? 둘 다 하라는 건지, 둘 중 하나만 하라는 건지도 불확실하고…”

당황한 표정이 드러나는 하민서를 향해 이준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서 씨. 잘 들으세요.”


“네… 네!”

“저기, 섬 한가운데 큰 나무가 보이죠?”

“네.”

“거기에 가서 상태창을 열면 오크 사원으로 올라가는 선택지가 뜹니다. 오크 사원으로 올라가서 기다리세요.”


“네? 저 혼자요?”

"다른 던전 2층과 마찬가지예요. 오크 사원 입구에 몬스터는 없어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준기의 표정이 너무 확고해 보였다.

하민서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주석도 그것까지는 모를 거예요. 올라가서 입구 근처에 적당히 숨어 계세요. 제가 나중에 도착하면, 같이 해요, 오크 사원.”

“나중에 오신다고요?”

“전 아린이를 찾아 데리고 올라가겠습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저… 저도 같이 갈래요!” 하민서가 얼른 말했다.

“아뇨. 저 혼자가 편합니다. 저 도와주시는 셈 치고 그렇게 좀 해주세요. 이따가 오크도 잡아야 하니까요.”

“저… 준기 씨, 아린이가 죽었을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죠. 사망자 명단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이준기의 표정은 차분했다. 이준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일단 가보기는 해야겠어요. 던전 입장하고 벌써 세 시간이 넘게 지났는데, 전 아직도 약속 장소에 가보지도 못했으니까요.”

“네…” 하민서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템 뽑기가 뜨자, 하민서는 서둘러 구입 버튼을 클릭했다.

상태창을 보면서 빠르게 손을 놀리는 이준기도 마찬가지였다.


“준기 씨, 저는 ‘게스 후’ 이거 나왔네요. 선택한 상대를 한 시간 동안 맵에 표시하는 그거요.”

“하하, 이런. 하필 이런 때에.”

“네?” 이준기의 허탈한 목소리에 하민서는 놀라서 물었다. "무슨?"


“컵라면 나왔어요. 이런 상황에 장난이라니.” 이준기가 웃으며 대답했다.

“컵라면요?”

“네, 컵라면. 그것도 두 개나.”

“아이템 뽑기에서 컵라면이 나왔다고요?”


하민서는 마상욱을 생각했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네. 보여드릴까요?” 이준기가 물었다.

“아, 아뇨.” 마상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민서는 얼른 사양했다.


“민서 씨, 부탁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해주시면 좋겠어요.”

“제 아이템, ‘게스 후’ 빌려드릴까요?”

“아뇨, 그건 주석 추적하는 데 쓰세요.”

"주석을요?"

"주석은 살인 미션을 선택했잖아요. 사냥감을 찾으러 다니고 있을 거예요. 나무까지 가는데 한 시간이면 충분할 테니까, 저와 헤어진 다음에 곧바로 쓰세요. 저는 이만 갈게요. 시간이 없어서요."


이준기는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하민서는 망설이는 눈동자로 멀어지는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


방패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듯 몸을 구부린 채, 한택수가 쓰러져 있다.

주석은 그걸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보급품 자판기에서 힐링 포션을 두둑이 챙긴 다음, 아이템 뽑기를 눌렀다.

선택한 한 사람을 한 시간 동안 맵에 표시하는, ‘게스 후’가 또 나왔다.


‘나쁘지 않군. 한택수를 잡을 때 잘 썼으니.’


한택수를 죽이고 나서 ‘구원자 첫 킬’ 업적이 떴을 때는 잠깐 놀라기도 했다.

모든 능력치가 5, 모두 합해서 무려 스탯 포인트 30이 주어지는 업적 보너스.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이쪽이 훨씬 수지맞는 장사잖아?’


게다가 별 필요는 없지만 한택수가 쓰던 방패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한택수가 쓰러지면서 그의 인벤토리가 바닥으로 쏟아진 걸 보고 속으로 대박을 외쳤지만, 탱커인 그가 쓰던 아이템은 주석에게 별 쓸모가 없어 보였다.

주워가서 다른 구원자에게 팔면 쏠쏠하겠지만, 인벤토리 압박이 있어서 적당히 챙겼다.


‘다마스커스? 개나 소나 쓰는 다마스커스지만, 없는 놈들도 많으니 팔리긴 하겠지?’


주석은 조하게 풀숲을 헤쳐 나갔다.

2라운드에서 한택수를 상대로 썼던 방법을 다시 써볼까 생각했다.

섬 중앙의 거대한 나무 근처에 숨어 있다가 기습하는 것이다.


‘이 섬에 두드러져 보이는 구조물이라고는 그것뿐이니까,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오크 사원 미션이 함께 나왔으니, 더더욱 그쪽으로 사람들이 모이겠지. 아무리 봐도 오크 사원은 큰 나무 위의 그 통나무집이 맞는 것 같으니까.’


주석으로서는 이준기가 죽인 상대가 누구일까 하는 것이 가장 궁금했다.

한택수의 숨이 끊어진 것이 확실한데도 미션 클리어 메시지가 나오지 않아 당황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두 명이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문제는 그 두 명이 누구인지, 심지어 1라운드에 소현배에게 쓰러진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


아이템 ‘게스 후’에 이미 죽은 사람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잘못된 대상입니다’라고 정직한 메시지가 나오겠지만,

악덕 상인 같은 이 던전 메시지를 생각하면, 죽은 사람을 그냥 한군데 가만히 있는 점으로 표시할 가능성도 크다.

정보가 그래서 중요하다.


‘지난 라운드에 한택수를 추적한 이유는, 초반에 공중에 떠 있던 나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 성격도 있지만, 역시 잡기 쉬운 상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가 아직까지 살아남았고, 누가 죽었을까.

주석은 차분하게 이번 공격대 명단을 정리했다.

세 명이 죽었고, 다섯 명이 남았다.


두 번째 미션을 클리어한 이준기는 분명히 살아 있고,

소현배나 김형채도 실력으로 보아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문아린, 하민서는 살아 있을까?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손쉬운 대상일 수도."


주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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