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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22. 2024

그렇게 구원자가 된다 ep 55.
회자정리

김형채는 숨을 죽였다.

아이템 설명에 그렇게 나와 있다.

보이지만 않을 뿐, 소리도 냄새도 막지 못한다고.

그래서 ‘은신 망토’를 쓰자마자 김형채는 숨을 죽였다.


문아린은 겨우 3미터 거리에 있다.

공격 행동을 하면 은신이 풀린다는 것이지만, 이 아이템의 존재 의의는 바로 그 선공 확보에 있다.

확실하게 기습으로 우세를 점할 수 있다면, 문아린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뽑기 아이템을 확인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용했다.


그런데 그 직후에 문제가 발생할 줄이야.

여전히 그를 동료로 생각한 문아린이 자신이 뽑은 아이템 정보를 링크로 보내온 것이다.

‘결박석’.

현재 위치에서 상대방을 얼려버린다는 설명이다.


김형채가 아는 한도 내에서, 한방에 적을 죽이는 기술은 없다.

코볼트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김형채의 선공은 그저 선빵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문아린도 바보가 아닐 테니, 김형채를 얼려놓고 도망가 버리겠지.

김형채는 들판 한복판에서 누군가가 선공을 날려주기를 기다리는 상 바보가 되는 것이고.


김형채가 선공을 날려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문아린과 그가 피차 서로의 아이템을 소비해 버리는 효과뿐이다.


‘자리를 떠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두 시간 동안은 숨어있기라도 할 수 있으니.’


그런데, 문아린. 보통내기가 아니다.

딱 한 번만, 그녀는 김형채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자, 곧바로 경계 상태에 돌입한 그녀는 주위에 온 감각을 집중하고 있다.

김형채를 탐지해 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이래서야 김형채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다.


***


“형채 씨?”


단 한 번만, 문아린은 김형채를 불렀다.


적막하다.

이따금 수풀을 쓸어대는 바닷바람 소리가 들릴 뿐.

새로 미션이 주어지고, 아이템 뽑기를 하던 중에 사라졌다.

뽑기 아이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김형채가 배신했다는 것이다.’


변수가 있다면, 김형채가 사라지기 직전, 문아린이 그에게 자신이 뽑은 아이템의 링크를 넘겨줬다는 것.

‘결박석’.


섣불리 정보를 넘겨준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

공격 즉시, 문아린은 ‘결박석’을 이용해 김형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 사실을 전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형채가 얻은 아이템은 뭘까?’


문아린은 생각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간 이동을 해버렸거나, 투명 인간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공간 이동을 해버렸다면, 문아린으로서도 나쁠 것이 없다.

김형채가 배신을 했건 말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조심하면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면 된다.


만약 투명 인간이 되었다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따금 바람 소리가 나지만, 이렇게 조용한데. 김형채, 혹시 아까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거 아닐까? 내 아이템 정보를 받았으니 그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아니, 다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던전 안이라면.

그냥 집에 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료 퇴각’, 이런 아이템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이런 던전이라면.


문아린은 김형채의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바지에 흙이 묻는 걸 꺼렸는지, 풀을 뉘여 그 위에 앉은 흔적이 있다.

풀이 누운 각도로 봐서는 현재 그 위치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 걸음이나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까? 정말 숨도 죽이고 귀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문아린은 활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김형채가 남기고 간 빈자리를 응시하면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매겼다.


***


이준기는 맵 중앙 부분의 북쪽 끝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다.


하민서가 ‘게스 후’를 빌려준다고 했을 때 그냥 받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호기를 부린 건 아닐까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아니, 그렇게 하길 잘했다.

받은 호의는 어떻게든 갚아야 하니, 선택에 제약이 생길 것이다.


난감한 상황인 것은 맞다.

2라운드 때 위치 추적을 했을 때, 문아린은 섬의 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약속 장소를 이탈해서 문아린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

영화나 드라마에 맨날 나오는 전개 아닌가.

서로 엇갈리는, 고구마 전개.


던전에 입장한 지 이미 세 시간이 넘게 지났다.

아직까지 도착하지 못했다면 뭔가 석연찮은 상황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최악의 경우, 주석이 살해한 대상이 문아린일 수도 있다.

소현배와 전투에 돌입한 이후, 이준기는 문아린의 위치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과연 여기에서 문아린을 기다리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무엇보다, 배틀로얄 미션보다 오크 사원을 먼저 끝내야 이 살육전을 멈출 수 있다.

그건 문아린뿐 아니라 살아남은 다른 모든 구원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심지어 사람을 죽인 주석에게도.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문아린의 위치는 여기쯤.’


이준기는 상태창을 열어 지도를 체크했다.

폭넓게 정찰을 하면서, 지그재그로 남동쪽을 향해 이동하는 경로를 그렸다.

마지막으로 문아린이 확인되었던 위치까지는 일단 가보는 것으로.

거기까지 가는 동안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오크 사원 미션을 진행하는 걸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멀리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남쪽에서부터 전력으로 사람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다.’


***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문아린은 김형채가 남긴 빈 공간을 노려보았다.

마치 유리로 만든 물체가 움직이는 것 같이, 빈 공간에서 상이 어그러졌다.


활시위를 놓기에는 너무 가깝다.

문아린은 손에서 활을 던져버리고 뒤로 빠르게 후퇴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척추파쇄자를 꺼내 쥐었다.


스캉!


김형채가 빨랐다.

척추파쇄자가 문아린의 손에 채 쥐어지기 전에, 상이 어그러진 곳에서 김형채가 튀어나오면서 양손검을 휘둘렀다.

양팔 상완부를 한꺼번에 베인 문아린이 뒤로 쓰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김형채, 이 배신자!”


김형채는 대답 대신 검을 고쳐잡고 내리찍었다.

옆으로 구르면서 간신히 피한 문아린.

정신없이 힐링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두 사람 모두 전투의 열기에 사로잡혀 ‘결박석’의 존재에 대해 잊고 있었다.

갑자기 자기에게 화살을 겨누는 문아린을 보고 이판사판 달려든 김형채.

갑작스러운 기습에 팔을 베이고 고통에 사로잡힌 문아린.


힐링 포션의 효과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자, 문아린은 일단 척추파쇄자를 들고 휘둘렀다.

땅에 박혔던 양손검을 때마침 빼내어 문아린의 도끼날을 막는 김형채.


챙!


도끼와 검이 부딪쳐 내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김형채는 갑자기 생각났다.


‘결박석. 당하기 전에 피해야 한다.’


김형채는 양손검에 몸무게를 실어 문아린과 그녀의 도끼를 뒤로 쳐냈다.

문아린이 휘청거리면서 균형을 잡으려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김형채는 등을 돌리고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균형을 회복한 문아린이 뒤따라 달렸다.


“김형채! 거기 서!”

“실수였어, 아린 씨! 제발 살려줘!”

“실수 좋아하시네.”


레벨이 둘 높아서, 그래서 민첩성이 조금 나은 김형채가 약간 더 빨리 달렸다.

전력 질주를 해도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자, 문아린은 퍼뜩 두 가지를 생각해 냈다.

이준기, 그리고 결박석.


‘결박석의 사정거리는 무려 100미터.’


달리던 것을 멈추고, 문아린은 북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는 김형채를 바라보았다.

100미터 밖으로 달아나려면 5초는 넘게 걸릴 것이다.

여유 있게 인벤토리에서 결박석을 꺼낸 문아린은 그걸 마치 리모처럼 앞으로 내밀면서 버튼을 눌렀다.


김형채는 달리던 자세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문아린은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김형채의 두 발이 모두 공중에 떠 있었다.

엄청난 전력 질주였던 모양이다.


던전과 이 아이템을 만든 자들의 능력도 대단하다.

과학일까 마법일까.

충분히 앞선 과학이라면,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살려주세요, 문아린 님.”

김형채가 비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득 터지려는 실소를, 문아린은 간신히 삼켰다.

들판 어디에 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


“시끄러워. 누가 와서 공격하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면 큰 소리는 내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문아린 님…”

“난 갈 거야. 난 김형채 씨와는 달라서, 동료 중에 누굴 죽이고 알림 메시지에 이름 올리고 싶지는 않거든.”

“절 두고 가시면, 죽고 말 거예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문아린 구원자님.”


“무슨 엄살이야? 내가 아이템 링크 보내줘서 다 알고 있잖아? 이거, 한 대만 툭 치면 깨진다는 거.”

“누가, 한 방에 죽이면 어떡하라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게 가능했으면 아까 형채 씨가 날 한 방에 죽였겠지. 그 투명 망토인가 뭔가를 뒤집어썼을 때 말야.”


“자비를…”

“자비? 한 번 시험해 볼까? 한 방에 죽이는 게 가능한지, 아닌지? 내 양손 도끼, 아직 많이 써보지를 못해서 말야.”

"사... 살려주세..."


그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아린아!”


소리 쪽으로 문아린이 고개를 돌렸다.

“준기 오빠!”


이준기가 나타났다.

김형채도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준기 씨!”


문아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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