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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Nov 27. 2024

낙랑에 살고 싶어라

[책을 읽고] 유성운, <한국사는 없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진한辰韓에 살던 염사치廉斯鑡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낙랑군에서의 삶을 선망하던 그는 귀화하러 가던 중 호래戶來라는 이름의 한인을 만났다. 호래는 3년 전 벌목을 하려고 진한에 왔다가 붙잡혀 노예가 된 1,500명의 중국인 중 한 명이었다. 염사치는 호래를 탈출시켜 낙랑군으로 함께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낙랑군의 위임을 받아 진한과 협상을 벌였다. 그는 ‘사로잡힌 중국인 포로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낙랑군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협박했고, 노예로 붙잡힌 중국인뿐 아니라 진한 사람 1만 5,000명, 포布 5,000필을 받아서 낙랑군으로 돌아갔다. 그 대가로 그는 관직과 토지를 받았으며 후손들도 부역을 면제받았다. 염사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민족 반역자’인데, 물론 이때는 그런 개념 자체가 희미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 한반도에서 낙랑군의 위상을 알려주는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58쪽)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에게 낙랑의 위상은 오늘의 서울과 같았을 것이다. 인구도 많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중국의 선진 문화가 유입되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서울보다도 더 대단한 것이, 낙랑에 살던 사람의 약 14%는 한인, 즉 중국인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홍콩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라는 말도 한다.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코스모폴리탄 도시였던 것이다.


염사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민족반역자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가 한반도를 한민족의 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라면 김춘추, 김유신이야말로 민족반역자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의 잣대로 저 당시를 살던 사람들을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변경에 살던 사람들에게 로마보다 살던 곳이 더 중요했듯, 낙랑인들에게 중국은 중요하지 않았다. 낙랑이 중요했다. 그래서 김진명의 <고구려>에 등장하는 낙랑의 통치자 최비는 낙랑의 국익을 위해 중국(진나라)을 망하게 하는 책략을 실행한다. (무려 8왕의 난을 배후조종한다는, 작가의 엄청난 상상력이다.)


낙랑의 역사를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당했다고 우리는 고구려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 대륙의 통일 왕조에 어떻게 한반도의 작은 나라가 대항할 있을까? 고조선은 한나라, 고구려는 당나라라는 통일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5호 16국 시대에 고구려는 중원의 패자들과 대등한 외교를 펼쳤다. 고려는 송, 금과 함께 삼국지의 형세를 펼쳐 자주성을 유지했다.


일제 시대가 부끄러운 것은 그당시 활개를 치던 기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 잘먹고 잘살고 있어서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라를 팔아먹은 주체가 고종과 이완용이다. 안창호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고종과 이완용은 나그네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나그네였다.



낙랑군이 잘 나갈 때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에게 낙랑은 하나의 옵션이었다. 그것도 꽤 훌륭한 옵션, 즉 이민 난이도가 높은 선진국이었다.


마찬가지 논리를 원-고려 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 충렬왕을 비롯한 몇몇 고려왕이 고려왕이라는 아이덴티티보다 원나라 황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더 중시한 것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판받아야 하는 태도는 강화도에 숨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무시한 말기 무신정권이나 남한산성에서 버티며 백성들을 죽이던 인조 정권의 행태 같은 것들이다.


나는 오랫동안 일본 전국시대 3인방 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일 하찮게 생각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결론이 완전히 바뀌었다. 실제로 에도 막부는 성립 시점에서 소멸 시점까지 가장 평화로운 막부였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잣대는 일견 너무 단순해 보이지만, 현재 인류가 가진 잣대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공정한 잣대 아닐까.


이런 초상화를 남기는 걸 보면, 과연 비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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