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매리어트는 중국인이다?

엠마 매리어트, <만들어진 세계사>

역사란 당시 그곳에 없었던 사람들이 말하는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들에 관한 거짓말 모음이다. -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멋진 인용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아쉽게도 그냥 억지 모음집이다. 저자 엠마 메리어트는 이름만 봐도 여자일 것이고, 서양인일 것이다. (사진으로 확인 완료) 그런데 자신이 중국인 남성 격투기 선수라는 소문이 항간에 널리 퍼져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저자가 뜬금없이 해명에 나선다면 어떨까? 아무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아니다"라는 주장과 비슷하다. 어떤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걸 논박하겠다고 하는, 아주 대담한 책이 바로 이거다. 

책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사람들은 헨리 5세가 영국 역사상 최고의 왕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아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는 무법천지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비스마르크가 전쟁광이었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는데, 전혀 아니올시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온다.

누가 헨리 5세를 영국 최고의 왕이라고 하는가? 영국 최고의 왕이라면,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 또는 정복자 윌리엄, 심지어 헨리 8세나 사자심왕 리처드가 후보로 나오기도 하겠지만 헨리 5세는 아마도 순위에서 꽤 뒤로 밀릴 것이다. 

서부 개척 시대도 마찬가지다. 서부 개척 시대가 무법 천지라서 서부로 발을 떼기만 하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갔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뭄에 콩 나듯했지만, 실제로 인디언 습격이라든가 총싸움이 있었고, 그런 사건들은 흥미로운 소재이기 때문에 널리 퍼진 것뿐이다.

비스마르크가 극우 전쟁광이라는 말은 이 책에서 처음 봤다. 나는 외교사를 공부했지만, 비스마르크를 외교의 귀재라 알고 있었을 뿐, 그가 전쟁광이라는 주장은 들어본 적도 없다. 감히 상상을 해본다면, 비스마르크가 없는 프로이센은 주변 열강들과 줄창 전쟁을 벌이다가 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국가들과 연이어 전쟁 벌이다가 남자 인구 90%가 줄어든 파라과이 꼴이 나지 않았을까.) 비스마르크가 있었기에, 프로이센은 수많은 상황에서 전쟁이 아닌 다른 옵션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건진 것이 없지는 않다. 재미있는 사실도 몇 개 알게 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독일어가 미국 공용어가 될 뻔했다는 도시전설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무려 미국인 부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미국의 공용어를 영어로 할까 독어로 할까 국회에서 투표를 했는데, 1표 차로 영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괴담의 파괴력은, 미국이 만약 독어를 공용어로 했다면 1, 2차 대전 당시 (같은 말을 쓰는, 즉 문화적 동질감이 느껴지는) 독일 편을 들었을 수도 있다는 아주 흥미진진한 가정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의사 & 엔지니어 커플) 미국인 부부가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 이 괴담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 수가 꽤 될 것이고, 그런 이유로 이 주장은 논박할 가치가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오해란 말이다. (그런데 이 괴담에 관한 내용은 미국 독립 관련 챕터에서 짧게 한 페이지 이하 분량으로 나올 뿐이다.)

진실은 이렇다. 독일 출신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던 시기, 기존의 공용어인 영어에 더하여 독일어를 병용하자는 안건이 국회에서 논의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그냥 논의만 되었을 뿐, 실제로 상정이 되지도 못했다. 투표 자체가 없었다는 얘기다. 

독일 출신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고 독일어가 공용어가 된다면, 미국의 공용어는 스페인어는 물론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중국어 등 10여 개 이상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별로 민주적이지 않으며, 공용어처럼 중요한 결정은 몇몇 파워엘리트에 휘둘리는 것이 현실이다. WASP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겨우 이거 하나 건지자고 이 책을 읽었다면, 좀 아쉽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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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나는 헨리 5세를 매우 좋아하고, 그 이유는 셰익스피어 사극 때문이다. 비슷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