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한 기록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일사불란하게 짐을 찾고 여행의 첫 단추인 숙소에 찾아 가기 위해 코벤트 가든역으로 향했다.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몇 몇의 가게에 눈도장을 찍어둔다. 사거리에서 왼쪽 코너에는 언젠가 사고 싶은 브롬톤 자전거 가게가 있고, 바로 길 건너에는 귀걸이를 좋아하는 친구가 생각나는 액세서리 가게가 있고, 좀 더 걸어가면 입구는 좁지만 맥주 진열장만은 큼지막한 마트가 하나 보였다. 새로 이사 온 동네를 둘러보는 듯, 이곳저곳 여기저기를 둘러보느라 분주했다.
당연하게 잠을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며칠 동안은 새벽에 눈이 떠졌다. 정 자세로도 누워 보고, 오른쪽 왼쪽, 엎치락 뒤치락 해보지만 결국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게 생겨버린 새벽의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이번 여행에서 함께한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었다. 좋아하는 여행 중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그것도 그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단순하면서 주관적인 책 선정이었다. 그림은 그저 이번 여행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들,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렸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창 밖에는 어느샌가 그 시간 볼 수 있는 색들로 가득해졌다. 그렇게 하늘은 아침이 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어두웠던 방은 점차 밝아오고, 방이 밝아질수록 배도 고파 왔다. 아침으로 햄, 치즈를 끼워 넣은 베이글 샌드위치와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어디서나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걸음은 닮아있었다. 일상의 익숙함으로 좁아진 시선과 목적지와 시간이 정해져 있는 정확한 걸음. 여행 중인 나는 같은 곳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과 다르게 새로움으로 넓어진 시선과 정해진 시간이 없는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한다.
성실하게 여행을 즐기고 있을 시간.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 첫 일정이었던 버킹엄 궁전 투어를 마치고 나와 도로의 끝에 보이는 빅벤까지 걸어갔다. 구글 지도를 켜볼 필요도 없이 그저 목적지만 보고서 그저 걸어갔다. 빅 벤은 나와 다가가면 갈수록 점덤 더 거대하고 선명해졌다. 영화나 드라마, 그러니까 모니터를 통해서만 보았던 그런 곳에 내가 와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그리고 확실하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어딘가에 앉아 머물러 있기에 좋은 시간이다. 카페일 수도 있고, 공원의 벤치일 수도 있고, 길거리의 어딘가가 될 지고 모른다. 어딘가에 앉아 눈으로는 나처럼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나 어딘가를 향하는 사람들을 보고, 귀로는 그저 들리는 것을 듣거나 듣지 않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하루 중에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는 그저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쉼이 필요하다.
여행을 가면 시야가 탁 트인 높디높은 곳을 꼭 찾아간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내가 걸었던 길이나 다녀왔던 곳이나 가 볼 예정인 곳들을 보고 있으면 초대형 직소 퍼즐을 완성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곳곳으로 나누어져 있는 퍼즐 조각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에는 내 나름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서울에서의 밤에도, 런던에서의 밤에도 무언가를 끄적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 끄적임은 어떤 날의 일정 정리가 될 수도 있고, 어떤 것에 대한 감상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것의 반성이 될 수도 있다. 낯설고 먼 곳으로 날아와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는 그때의 끄적임은 엉기성기 뒤엉키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상태에 가깝다. 그런 여행의 끄적임을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 다시 꺼내보면 비소로 정리되고 다듬어지고 추억된다. 지금 이 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