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북]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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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북’은 1960년대 초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절 흑인들을 위한 여행지침서 제목이다. [그린북]은 잘 나가는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운전기사가 된 건달 백수 떠버리 토니(비고 모텐슨)가 셜리와 함께 인종차별이 더욱 극심하던 미국 최 남동부 지역까지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담은 영화이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할리우드를 지배하던 메이저 영화들 속에서 흑인들이 겪던 ‘인종차별’이라는 키워드는 ‘유머’라는 장치로 소모되곤 했다. 흔히 속도위반 같은 간단한 도로교통 위반 끝에 백인 경찰이 차를 세우면, 흑인 운전자는 요란하게 자신들을 변호하며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경찰에게 ‘흑인’이라는 점을 앞장 세워 경찰을 인종차별자로 몰아간다. 아니면 떠벌이 흑인 캐릭터가 하나 나와 흑인들이 겪는 스테레오 타입에 대해 열변을 토해가며 부정하지만, 정작 그 캐릭터가 그런 고정관념을 그대로 행하는 과정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이었다. 아마 그 당시를 인종차별이 많이 옅어지던 과도기로 생각했을 때, 그런 식의 자학적인 개그들이 당대의 분위기에 알맞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던 시기를 지나 요즘의 인종차별을 타파하려는 영화들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 [노예 12년] 속에서는 참담했던 흑인 노예에 대한 처우를, 영화 [겟아웃]에서는 인종에 대한 차이와 차별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날 선 풍자를, 영화 [블랙팬서]에서는 메이저 시장 속 흑인에 대한 달라진 입지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영화 [그린북]은 흑인들이 겪었던 인종차별에 대해서 어떤 접근방식을 택했을까?
영화는 전형적인 흑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들을 시대상과는 모순된 두 주인공의 상반된 위치와 관계로 보여준다. 돈 셜리의 운전수가 된 토니부터, 그의 별명이 떠버리이다. 90년대 영화 속 쉴 새 없는 대사를 보여주던 흑인 캐릭터와는 달리 돈 셜리는 지극히 점잖고, 해야 될 말만 하는 스타일이다. 처음 돈 셜리의 집무실에서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도 돈 셜리는 왕좌 같은 의자에 토니보다 높게 앉아있는 모습은 둘의 대비를 보여준다.
돈 셜리는 대범하게 계약 조건을 높게 부르며 나가는 토니를 미국 남동부 지역 순회공연에 함께 할 운전기사로 발탁하게 된다. 특히 켄터키 주를 지나며 프라이드치킨을 먹는 토니는 셜리에게 군인 시절 흑인 조리사가 치킨을 그렇게 좋아했다며 권하지만, 셜리는 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다며 토니에게 흑인에 대한 선입견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토니에게 그런 훈계는 와 닿지 않을 뿐, 일단 한 입 베어 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며 협박 비슷하게 강권한다. 결국 마지못해 치킨을 먹는 셜리는 이내 치킨 맛에 매혹된다. 이 장면은 코미디의 가장 기본적인 플롯을 보여주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엇박자 코미디를 하나 더 보탠다. 갈등-유머-갈등-유머라는 기본 법칙이 굉장히 잘 맞춰진 밸런스를 갖추고 있다. 영화 [그린북]은 이런 식으로 가장 기본적인 코미디 영화의 정석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 않고, 굉장히 정석적이며 깔끔한 한정식을 먹는 느낌을 준다.
영화 속에서 갈등이 고조되던 둘은 말다툼이 이어지고, 토니는 셜리 본인보다 자신이 훨씬 흑인(피해 집단)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급 자택에서 사는 셜리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이 ‘차별’이라는 것에 더욱 합당하다고 말이다. 화가 난 셜리는 차를 세워 나가고, 그런 자신을 붙잡는 토니에게 자신은 고급 옷을 입고 좋은 저택에 살기에 열악한 흑인 세계에도 못 끼고, 그렇다고 상류 사회 속에서는 서커스 단원 같은 꼴로 백인들의 같잖은 위선 속에 섞이지 못하고, 남자도 아닌(영화 속에서 셜리의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울부짖는다.
실제로 돈 셜리의 가족들은 이 영화를 ‘흑인의 삶에 대한 백인의 묘사’라며 맹비난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 이 영화에서 나온 장면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자.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먹는 장면에서, 토니는 불쾌해하는 셜리에게 이탈리아 사람이 스파게티와 피자를 좋아한다고 했다면 자신은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자신의 처우가 셜리보다 더 나쁘기 때문에 그가 겪는 ‘차별’은 자신만 못하다고 결론짓는다. 백인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그 자체로서 비난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현재까지도 우리는 많은 ‘차별’을 받으며, 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성과 남성으로 나눠진 대립 집단에서는 ‘성차별’로, 자신의 지역에는 장애인 특수목적 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장애인 차별’까지, 우리는 우리와 다른 무언가를 규정하며 그에 대한 두려움과 이질감을 갖는 것이 본능이다. 이 행태가 보다 극명하게 집단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공격적인 태도를 지닐 때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 지칭한다. 흑인과 백인의 갈등의 최고조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고, 세계는 다인종 사회가 되어가며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대두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피해 집단 속에서도 역시 작은 분화를 만들고 ‘차별’이라는 몽둥이를 들어 자신보다 약한 집단에게 린치를 가한다. 차별을 무너트리는 것은 상대 집단에 대한 전복이 아닌 경계를 허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영화 [그린북] 속 토니와 셜리는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용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경계에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반대편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 그 ‘무지’가 칼날이 되어 상대에게 향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에 행동에 대해 ‘무지’ 한 것 역시 당연하다. 그들의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들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표용 할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용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