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를 거인으로 오인해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던 돈키호테 이야기. 나는 그 장면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한 것일까? 거인이 풍차로 숨어있던 것일까? 과연 무엇이 진짜일까?
테리 길리엄의 90년대 명작 [12 몽키즈]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테리 길리엄의 작품답게 현실과 환상의 그 모호한 경계 속에서 인물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혼란스럽게 그리고 있다. 과거 열정 가득했던 대학생 토비는 자신의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위해 평범한 작은 마을의 하비에르를 돈키호테로, 선술집 딸 안젤리카를 둘시네아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자 그들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떠나 버린다. 그렇게 남겨진 하비에르는 자신을 돈키호테라 생각하는 미친 노인이, 안젤리카는 허황된 꿈을 좇다 창녀가 된다.
잘 나가는 CF 감독이 된 토비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잘 나가는 CF 감독이 되어 다시 스페인을 찾은 토비는 현실 속 위기에 봉착해있다. 보스의 여자를 건드린 사실이 들킬까 조마조마해하며, 넘쳐나던 재능은 고갈되어 촬영은 지지부진하다. 우연히 회식자리에서 자신의 졸업 작품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DVD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옛 촬영지였던 그 마을을 찾게 된다. 그러나 아름답던 추억과는 달리 그곳에서 갇혀 있는 하비에르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구출하게 된다.(물론 사고로 인해 토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후 방화 혐의로 경찰에게 후송되던 토비는 풀려났던 돈키호테(하비에르)가 경찰차를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는 덕분에 풀려난다. 그러나 그 일로 경찰들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고, 그 일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걱정된 토비는 자신을 산초로 생각하는 돈키호테와 함께 도망가게 된다.
토비와 하비에르 (왼쪽부터)
토비는 현실을 살아가던 하비에르와 안젤리카를 돈키호테, 둘시네아로서 환상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에게 버림받은 그 둘은 온전히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채 미친 노인과 창녀로 변질된다. 그리고 먼 훗날 현실에서 방황하던 토비는 우연히 만난 미친 노인을 다시금 멋진 기사 돈키호테로 이끈다. 그리고 이번엔 돈키호테가 토비를 산초로 오인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돈키호테라는 환상 속 인물이 이번엔 역으로 자신을 환상으로 이끈 것은 그가 행했던 업보로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주위에서 그들을 다시 현실로 인도하려는 사건이 발생할 때 도리어 산초(토비)가 그 귀한을 방해하게 된다. 토비가 자신의 업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의지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우연히 재회한 안젤리카
치욕당하는 안젤리카를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토비
돈키호테와 산초로서 함께 자신의 촬영지(프로덕션)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안젤리카와 재회하게 된다. 그녀는 보드카 대부호 알렉세이의 창녀(현실)로 살고 있으며 이를 알아차린 토비(산초/환상)는 그녀를 구해줘야 된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알렉세이 앞에서 치욕을 당하는 안젤리카를 구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 화만 낸다. 그때 앞 상황에서 우연히 발견한 금화가 가짜임을 알아차리는 토비의 모습은 그가 산초(환상)로서 그녀를 구하지 못한 채 다시 토비(현실)가 됨을 보여준다.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제목이 영화 속 토비의 첫 작품 제목과 동일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업보와 윤회라는 주제를 코믹한 상황 및 반복되는 설정들을 적절하게 섞어 녹여내고 있다. 테리 길리엄 특유의 어떻게 진전될지 모르는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상황들은 관객에게 지속적인 혼란함을 주지만, 결말에 와서 그제야 관객은 자신이 뒤통수를 크게 맞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비에르는 자신이 출연했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흑백 영화가 비치고 있는 곳에 갇혀있었다. 자신의 환상이 비쳤던 영화를 거울삼아 거짓에 속은 하비에르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을 거울이라 착각한 채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풍차를 공격함에 있어 오해나 착각을 핑계로 대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풍차에 숨어있던 거인을 부수고 싶었다는 것을 밝히기 싫을 뿐이다. 그런 거짓들로 도피한 결과는 남들의 비웃음뿐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