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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문 May 31. 2019

공생과 기생의 차이

영화 [기생충] 리뷰

※ 영화 [기생충]은 예측 불가능한 서사가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영화를 관람하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감상하시길 추천드립니다.          






     

※ 꼭 영화 관람 후에 오세요.














  이 영화는 계획이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언급된다.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예측하고, 그 예측에 걸맞은 준비를 의미한다. 영화 속 기택 가족의 장남 기우(최우식)는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계획이라는 게 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친구의 주선과 위조문서로 박사장(이선균)네 첫째 딸 다혜의 과외선생으로 오게 된 기우는 이 집 안에 자신의 가족을 침투시킨다. 영화 전반부의 경우 기우의 계획은 어떠한 브레이크 없이 무사히 나아간다. 관객들은 두 번째 빨대인 기정(박소담)이 다송의 미술 선생님으로 온 후로는 주인공 가족이 박사장  집에 차례로 기생할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심지어 기우에게 반하는 다혜의 모습도 작위적일 정도로 빠르게 그려진다. 그러나 탄탄대로 가던 이 계획에 제동이 걸린다.    



박사장의 물건들을 자신들 것처럼 막 사용하던 기택 가족들에게 박사장 가족이 등장하여 긴장감을 줄 것은 천둥번개가 몰아치며 폭우가 내리는 배경을 통해 예상이 가능했지만, 별안간 기택 가족을 막아선 것은 뜬금없게도 전 집사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관객에게 예측 불가능한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놓고 온 것이 있다며 충숙에게 사정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집에 들였지만 오랫동안이나 지하실에서 올라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지하실로 직접 내려간 충숙과 가족들은 기괴한 자세로 지하실 벽장을 밀고 있는 집사를 발견한다. 지하실 비밀 문이 열리고 급하게 먼저 내려가 사라지는 집사와 그녀를 쫓는 충숙의 장면은 모든 관객의 숨을 멎게 한다. 영화 [기생충]은 이렇게 초반 상황을 누구나 충분히 예측 가능하게 빌드업을 마친 후에 전 집사의 방문을 기점으로 하여 예측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관객을 던져 버린다. 무방비 상태의 관객들에게 이 작은 난기류를 기점으로 이 영화의 비행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바탕 난리 통이 벌어진 다음에는 관객이 잠깐 잊고 있었던 박사장 가족을 소환한다. 역시나 폭우 때문에 캠핑은 취소되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집과 비밀 벙커 상황 속 계획에 없던 변수들은 끊임없이 튀어나와, 긴장된 상황 속 주인공 가족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진이 빠지게 만든다. 이후 박사장 눈을 피해 무사히 집을 빠져나온 기우는 비밀 벙커에 결박한 집사와 지하실 남편을 어찌해야 할까 걱정이지만 기택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실패할 일 없는 것이라며 기우에게 계획에 대한 괘변을 늘어놓을 뿐이다.


기택 가족이 부자인 박사장 가족에 기생한다는 전체 줄거리를 통해 제목 ‘기생충’이 가지는 비유가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미 밖으로 드러난 기생충이라는 것을 다르게 생각해보자. 기생의 사전적 정의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인 이득을 취할 때 표현된다. 부모-자식이라는 관계에 있어서도 완전히 떨어트려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이라 표현되는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를 비단 기생이란 표현으로 격하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인 지원만큼은 부모-자식의 관계에 있어 자식이 장성하기 전까지 분명 ‘기생’ 관계로 볼 수 있다. 박사장 가족을 잠식하고 있는 기택 가족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풍요가 충족된 박사장 내외가 자신들의 자식을 부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아무런 능력이 없는 기택과 충숙 부부에게는 자식에게 지원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이 전무하다. 그렇기에 기우는 자신의 부모가 아닌 박사장 집에 기생하게 된 것이다. 

폭우 속에 집을 두고도 젖지 않는 텐트에서 자는 다송과 집이 침수되어 대피소에서 자는 기택 가족


처음 피자박스 수당을 따질 때 아내 뒤에 떨어져 있는 기택의 모습이나 기우의 계획 하에 움직이는 모습을 통해 어떠한 물질적 지원을 해줄 수 없는 부모의 유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풍족하지 못한 기택은 자식이라는 기생에 잠식되어 자기 의지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바보가 돼버린다. 결국 자식을 기생충으로 만든 것은 기택 자신인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잠식하고 조종했던 기생충인 자식 둘이 쓰러지자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그와 상반되게 물질적인 풍요가 기반된 박사장은 다송이 쓰러지자 필사적으로 자식을 끌어안은 채 그곳을 벗어나려고 한다. 결국 하위 계급의 가장 큰 분노는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대물림되는 것임을 박사장을 찌르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 [기생충]은 후반으로 갈수록 예측 불가능한 전개로 관객 몰이를 시작한다. 물론 이를 통해 훌륭한 서스펜스도 만들어냈지만, 이 영화가 더욱 빛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두 가족들의 대비를 통해 메시지를 강화했다는 점이다. 기택 가족과 비슷하게 박사장과 연교 역시 일상에 있어서는 굉장히 무계획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일상적 무계획을 통해 마주하는 급류들은 그들에게 전혀 예측해야 할 위험한 상황들이 아닌 것이다. 결국 자식을 부양하는 평범한 일(넓게 생각하면 함께 살아가는 것) 조차 누군가에게는 공생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기생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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