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영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읽고.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한 챕터씩 천천히 읽었다.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이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 나는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어떻게든 유의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 책의 리뷰 제안을 받은 상황이 좀 아이러니했다. 나는 엄마가 없는데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이라. 그래도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없어도 나에겐 많은 여자들이 있으니까. 엄마와 같은 존재였던 할머니와 세 명의 고모들. 책을 읽으면서 어김없이 그들을 생각했다.
서문을 읽다 보면 응원하게 된다. 이것의 '가능'보다는 '불가능'을 먼저 떠올렸기에 불가능한 이 일을 실패하더라도 성공적으로 실패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어려움이 너무나 절실히 느껴졌다. 내가 이런 책을 쓰기로 맘 먹었다면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다. 저자의 어머니가 지난 시간을 회상한다. 저자는 단순한 청자가 아니라 목격자로서 한 여성이자 어머니의 지난 인생을 다시 썼다. 자신에겐 할머니이자 엄마에겐 시어머니인 또 다른 여성에게까지 확장되면서 이 일의 어려움을 더욱 실감했다. 이 세상 여성들은 전부 참 복잡하고 이상한 존재들이구나. 너무도 단순하지가 않다. 무척 사적인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머니다움'에 대한 정의는 일종의 신성(神聖)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처럼 이상적 어머니상은 신에 필적하기에 모든 어머니는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한다. 어머니가 '실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어머니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할 것이다. p.128
내가 보고 자란 할머니가 있다. 사랑도 주고 상처도 주었던 할머니. 같이 살다 따로 살게 된 후 언젠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주는 건 당연한데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당시엔 못했을까 그런 생각. 실패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배제한 채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름답고 자상한 할머니가 되어주길 요구한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 나처럼 고모들도 저마다 할머니로부터 섭섭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타자가 되어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가 아니라 그냥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할머니라고 뭐든 처음이 아닐까. 자신의 생도 처음,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도 처음, 누구의 며느리가 되는 것도 처음, 누구의 엄마, 누구의 할머니가 되는 것도 모두 처음일 텐데 불완전한 것이 당연하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며 얻은 수확이랄 게 있다면 할머니도(그리고 고모들도 나도) '누군가의 어떤 존재'이자 어떤 '性' 이기 전에 불완전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서서히나마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엄마와 함께 공동 회고록을 쓸 수는 없다하더라도 함께 이 책을 읽어볼 순 있겠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이 책을 읽는 엄마들은 어떤 모습일까가 또 궁금하다. 어쩌면 이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우리가 엄마이자 동시에 한 여성인 그 이상한 존재를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연한 실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의미한 시도였다. 그리고 멋진 실패였다고 하면 서운하실까.
/ 엄마가 자신의 엄마를 회상하며 '동네의 공공재'라고 말했듯, 나도 엄마를 '집안의 공공재'로 여기지 않았는가? p.08
/ 이 책은 엄마의 삶을 경청하고 해석하고 감응하려는 작업이었다. 많은 딸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옹호자를 자처하지만, 나에게는 그 중간 단계로써 해석이 필요했다.(...) 나의 해석은 한 사람 속으로 '들어감'이고 '물러남'이다. p.09
/ 우리는 모녀라는 관계의 타자로서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 또는 알기에 엄마에 대해 쓰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을 실행하기에 이 작업의 결말은 확실시된 실패이지만 의미 있게 실패하고 싶었다. 성공적으로 실패하고 싶었다. p.10
/ 글쓰기의 본질은 불가능을 '실현'하는 일이 아니라 '시도'하는 일이라 믿는다. p.10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말처럼 "한 인간의 존재 속에서 엄마란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 결단코 가장 이상하고 예측이 불가하며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머니는 영원히 불가사의한 문학적 주제일 것이다. p.11
/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배우가 되고 싶어. 나는 상인이었다가 농부였다가 군인이었다가 정치인이었다가 예술가일 거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모두이면서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되겠지.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