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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부부 Feb 28. 2022

남의 것을 내 것인 양 빌려 사는 삶

이번 생은 미니멀 

이탈리아에서 집 없이 한참을 떠돌다 32인치 캐리어 4개를 끌고 월세 백만 원짜리 신혼집에 입성하던 날, 남의 집을 꼼꼼히 닦으면서 나는 다짐했다. 


남의 것을 내 것인 양 빌려 살아가는 동안에는 절대 짐을 늘리지 않겠노라고. 


반드시 내 집 마련을 하겠다는 다짐보다 곱절은 비장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산다는 것은 내가 짐을 늘리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음에도 매일 사정없이 불어나는 것이 아닌가. 거리에도 온라인 세상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물건이 넘쳐났고 손가락 하나만 있으면 세계 각지에서 가장 저렴한 물건을 비교까지 해가며 소유하기 쉬운 세상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언젠간 필요할 것처럼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사고 또 샀다. 특히 세일의 유혹 앞에서 나는 사정없이 흔들렸다가 못 이기는 척 지갑을 열었다. 남의 집을 빌려 사는 삶을 지속하게 되자 주렁주렁 내 몸과 함께 떠돌아야 하는 물건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국처럼 중고 상품 거래가 활발하지 않은 데다가 부피가 큰 물건은 버리기에도 까다로웠으며 내 일부가 된 짐들을 차가운 길바닥 아무 데나 버리는 일에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짐들을 줄줄이 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은 것은 약 삼 주 전이었다. 세입자인 우리의 집 계약기간이 3년이나 남았는데 이 집을 팔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날부터 집안 곳곳에 늘어진 물건들을 째려보면서 여러 번 한숨을 내쉬었다. 품고 갈 것, 어쩌면 1년에 한 번쯤은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 차가운 땅바닥에 버릴 것을 가르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2년 사이에 이만큼이나 물건이 늘어났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소비를 많이 했다는 반증이 된다. 정신이 번쩍 들어 작년 한 해 가계부를 총정리해 보았다. 맙소사! 남편이 일할 때만큼이나 돈을 쓰며 살았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여행을 많이 다닌 탓도 있지만 분명 내 눈앞에 늘어나 있는 기념품들은 충동구매였다. 언젠간 버려질 물건들이었는데도 당장 기분에 현혹되어 기어이 가방에 담아 오고야 말았구나. 현실을 직시하고 나서야 버릴 용기가 생겼다. 더 이상 남의 집에서 떠도는 내 물건들에 압도당하지 않겠노라고 이번에는 진짜 무소유의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비우기를 결심하면서 ‘미니멀’에 관한 책을 연달아 읽고 영상을 찾아보았다. 내 상황과 맞물리면서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만 할 것처럼 빠져들었다. 그들이 권하는 대로 필요 없는 물건,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 1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물건, 서류, 추억이 있는 물건을 차례대로 버렸다. 서랍 구석구석 쓸데없는 물건들을 전부 끄집어내서 분류하고, 냉장고와 식료품 창고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를 쓸어 담아 버렸다. 켜켜이 쌓인 물건들 틈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여러 번 구매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물건들은 사는 것보다 더 쉽게 버려졌다. 4계절 이상 입지 않은 옷, 몸에 맞지 않는 옷, 유행이 지난 옷, 충동적으로 구매한 옷, 아까워 버리지 못한 옷들도 과감하게 버렸다. 코로나 시기 외출이 잦지 않아 외출복을 거의 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쏟아져 나오는 옷더미를 보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미니멀 라이프가 되는 과정은 이렇듯 나의 민낯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없는 우리 부부의 식기류는 그릇, 수저, 컵까지 종류별 4개씩만 남겨 두었고, 읽지 않는 책은 동네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고 200권만 품었다. 활자 중독자인 내 기준에서 책 정리가 가장 힘들었는데, 전자책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종이책마저 미련 없이 보내줄 수 있었다. 필요 없는 서류들을 꼼꼼히 분류해 버리고, 마지막으로는 추억의 물건만 남았다. 가장 고민을 오랫동안 한 분야이기도 했다.      



연기자 신애라 씨는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연기자 생활을 추억할 수 있는 수많은 트로피와 자녀들이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작품 중 가장 소중한 2~3점만 남기고 모두 버렸다고 했다. 어쩜 그렇게까지 냉정할까 싶었지만, 그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나한테 진짜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만 남게 되고 

그것들을 더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모아 온 마그네틱, 종이 엽서, 기념품을 모두 버렸다. 골동품 시장에서 구매했던 도자기, 그림, 앤틱 장식품 등 값이 나갈 법한 물건들도 모두...    


  

지금 생각해보면 퍽 속이 쓰리지만 내가 만족할 만큼 비우고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고 벅차게 행복하다.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고 단순한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며칠 전 집주인이 계약 후 2년 만에 처음으로 집을 보러 왔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것처럼 텅 빈 집을 보고 깜짝 놀라서 돌아갔다. 그리고는 집을 깨끗하게 사용해 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연거푸 보내왔다.      

“집 계약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쫓아낸 사람이 누군데! 일주일 동안 당신 집을 쓸고 닦으며 내 물건을 버리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집 없는 세입자의 서러움이 ‘욱-’ 하고 밀려왔다가 깨끗해진 집을 보면서 이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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