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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잌쿤 Mar 25. 2019

우상(2019)

불친절하다고 다 심오한 것은 아니다.

※ 브런치 무비패스 참여 작품입니다(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그런 영화가 있다. 제목이나 포스터의 문구 만으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 영화. 인터넷 검색을 통해 플롯을 읽어보고 대략적인 정보를 찾는다. 그래도 이해가 충분치 않다. 결국 144분이 지나 크레딧까지 지나쳤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우상'이라는 제목도, 이를 표현하기 위해 144분이나 할애한 내용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감독은 “사람이 이루고 싶은 꿈이나 신념이 맹목적으로 변하면 그것 또한 하나의 우상이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를 만든 이유”라고 인터뷰를 했다. 우상으로 표현되는 맹목적인 신념이 이 작품의 함축적인 주제였다. 영화의 포스터는 세 사람의 주요 등장인물을 평면적으로 배치하고 '그 날의 사고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는 문구를 중앙에 두었는데, 이는 영화가 하나의 사고로 인해 얽히고설킨 세 사람의 이해관계를 사용해 복합적인 가치관을 제시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제목이 '우상'이라면, 세 사람의 맹목적인 신념으로 인해 갈등이 고조되고 파국으로 치닫는 식의 전개가 그려진다. 상당히 성공적인 표현이다. 딱 여기까지다.


그런데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맹목적인 신념'을 그려내는 인물은 구명회 단 한 사람뿐이다. 유중식은 신념이 명확하지 않고, 최련화는 말미에 스스로 신념을 저버렸다. 그냥 정치인 하나가 권력을 잡아보겠다고 미친 짓을 벌이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다른 인물의 캐릭터성까지 희생해가며 억지로 메시지를 만들어낸 셈이다. 유중식과 최련화는 특별한 갈등도 없고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다. 이 작품의 플롯은 하나의 사건과 세 개의 시선이 아니다. 사건을 향한 시선은 구명회 한 사람만의 것이며, 유중식과 최련화의 시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보다는 구명회에게로 점점 좁혀지고 있다. 차라리 구명회와 유중식/최련화의 2대 1 구도를 표현하는 것이 영화 포스터에 더 적합할 듯하다.


그런데 그마저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처음에는 보수당임에도 불구하고 원전을 반대하는 등의 정치적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발산시켜 관객들로 구명회의 캐릭터를 혼란하도록 만들더니, 최련화를 찾아내는 시점부터 갑자기 여성을 납치 감금하고 몽둥이로 쥐어패는 등 급격한 반전을 이룬다. 이 장면에서 관객이 느끼는 심리는 구명회의 이중적 성격에 대한 깨달음보다는 급격한 캐릭터 변화로 인한 당혹감에 가깝다. 아들을 자수시킬 정도로 이미지 관리에 철저한 인물이 실명으로 심부름센터를 고용하고 직접 행차하여 여자를 폭행한다는 설정은 일관성이 부족하다. 그리고 최련화에게는 '착하게 살라'는 말도 안 되는 멘트를 친다. 이 뜬금없는 대사는 대체 어떻게 생각해낸 것인지 모르겠다.


유중식은 '정치권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힘없는 서민' 이상의 인물이 아니다. 이미 여러 영화에서 수없이 소비하여 닳도록 닳은 캐릭터다. 정성으로 보살피던 장애인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은 아버지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집착하는 모습은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부성애 깊은 아버지일 뿐이지 '우상'을 쫓는 맹목적 신자가 아니다. 최련화는 한국 국적을 얻어 한국에서 살기 위해 필사적인 조선족 여인이다. 국적에 대해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목적이 다름 아닌 본인의 '생존'이라면, '신념'이 뒷받침되어야 할 '우상'으로서의 요건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유중식은 광화문 충무공 동상의 목을 테러한 뒤 "수백 명이 죽어나도 눈도 꿈쩍 않더니, 동상 목 자른 거 가지고 지랄들"이라고 독백한다. 최련화는 안하무인인 구명회의 모친을 위협하며 "칼로 입힌 상처는 치료가 되지만 입은 아니 된다"라고 말한다. 두 대사 모두 각자의 캐릭터성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오히려 그냥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든 표현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 넣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두 대사는 '우상'이라는 주제에도 어울리지 않고, 2시간을 넘게 설명한 인물들의 성격에도 맞지 않는다. 최련화의 '희생'은 마지막 장면에서 구명회가 일그러진 얼굴로 격정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을 넣기 위해 의도된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 어색하기만 하다.


유중식도 최련화도 각자의 우상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자신의 신념을 달성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이는 집착을 보여야만 했다. 유중식이 자신의 '씨앗'을 남기기 위해 최련화를 겁탈하고 협박한다거나, 최련화가 '한국인 최련화'를 살아가는데 뒤탈을 없애기 위해 유중식을 배신한다거나 하는 인간 내면의 군상을 표현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끝내 선악의 구분선을 극복하지 못하고 보는 사람을 김 빠지게 한다. 결국 구명회가 나쁜 놈이고, 유중식과 최련화는 언더도그마였다. 심지어 최련화는 살인과 사기를 저지른 범죄자이며 악당이다. 혼인신고 안 해준다고 사람을 죽이는 악녀가, 2천만 원 들여서 자신을 찾아내고 혼인신고를 해줬다고 감동받아 유중식을 위해 목숨 바쳐 복수를 자행한다? 최련화에 비하면 오히려 구명회야말로 죄 없는 시민의 한 사람이 아닌가.


단정 짓기 힘든 캐릭터와 설득력 떨어지는 행동들이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을 무색하게 했다. 관객을 사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겨야 하며, 철학적인 메시지란 쉽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질문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상'에서 그 의도는 실패한 것 같다. 이미 감독이 정답을 정해놓고 두 명의 캐릭터성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정치인은 나쁘다'고만 목놓아 외치고 있는데 이 사이에 어떠한 사색이 개입할 수 있을까.


우상(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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