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이상하게 증가하고 있는 정치와 문화예술의 연결이 딱히 반갑지는 않지만, 문화예술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의도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성패가 대중에 의한 각인 여부와 직결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막대한 파급력을 가진 대중매체보다 매력적인 도구가 있을 수 있을까. 정치나 대중매체나 다수의 군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설득력을 얻고자 하는 공통된 속성이 있다. 이 속성은 일반적으로 '인기'라고 부른다. 정치도, 대중매체도 인기를 바탕으로 생명력을 얻으며, 인기를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둘 사이에 협력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논점이 있다.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매체는 '감성의 영역'에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내면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다양한 감정을 유발하는 문화예술은 분명 감성적인 행위를 바탕에 둔다. 그러면 정치는 어떨까. 정치가 감성의 영역에 필요 이상으로 발을 담그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감성과 이성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감성의 영역에서는 옳고 그름을 논하기가 어렵고, 이성의 영역에서는 정서적 공감을 만들기가 어렵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어느 영역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명백히 다르게 읽힌다. '정치적 논란'은 바로 여기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두 가지 시각은 서로 목적이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다르므로 정치와 같이 민감한 사안을 건드리는 이는 두 가지를 혼용해서는 안 된다. 대중매체, 특히 영화와 같이 시청각적으로 메시지 전달이 강력한 장르는 더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영화 '김군'은 다큐멘터리다. '26년'이나 '택시운전사' 등 픽션을 표방한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이성의 영역'과 충분한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분야다. 하지만 '김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성의 영역을 표방하면서 시작하다가 중반부 이후로 슬그머니 관객을 감성의 영역으로 끌고 간다. 그 과정이 다분히 의도적이기에, 이 영화는 조금은 비겁해 보인다.
지만원 박사가 '광수설'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영화 '김군'은 4년 간 만든 영화라고 했으니 '김군'의 제작이 착수된 것도 2015년이다. 사진 속 청년의 정체를 두고 지만원 박사와 제작진은 같은 출발선에서 진실을 찾으려 한다. 지만원 박사가 주장하는 것은 이 청년이 광주 시민을 선동하기 위해 파견된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것, 제작진이 주장하는 것은 이 청년은 정부의 탄압으로 희생된 광주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이 영화의 제작 목적을 보자. 제목은 '김군'이고, 제1광수로 지목된 5.18 당시 한 청년의 사진을 포스터로 차용하고 있다. 영화는 지만원 박사의 주장을 보여주고 시작하며, 중반 이후까지 '이 사람을 아느냐'는 인터뷰로 영화의 러닝타임을 채운다. 둘의 목적은 동일하다. 청년의 정체에 대한 진실. 진실은 철저히 이성의 영역이다. 제작진은 5.18 당시 참혹한 현장의 중심에 있었던 생존자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는 방법으로 '김군'의 정체를 밝히려 한다. 즉 영화의 제작 목적은 진실을 밝히고 지만원 박사와의 공방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진실공방, 이것은 명백한 이성의 영역이다. 영화 중반까지는 그렇다.
그래서, 김군은 대체 누구인 건데?
중반 이후로 이미 주제는 흐려지고 자꾸만 감성의 영역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제작진의 회피를 느끼면서, 크레딧이 채 오르기도 전부터 이 영화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한 사람씩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어느샌가 제작진의 시선은 김군의 정체에서 5.18 희생자들의 사연과 회한으로 초점을 옮겨간다. 마치 처음부터 김군의 정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듯, 후반에 접어들며 영화의 주제는 지금도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당시 시민군들의 삶에 대한 조명으로 변해있었다.
생존자들의 아픈 상처는 '감성의 영역'이다. 그들이 느꼈던 아픔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감정은 공감하는 것이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그 감정 자체를 따지고 들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결말이 과연 이 영화가 처음부터 의도하던 방향이었느냐고 한다면 동의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성에서 시작한 진실공방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제작진은 감성의 영역으로 방향을 돌려 관객으로부터 공감이나마 얻어내는 것으로 영화의 가치를 입증받고자 한 것은 아닐까. 이 영화가 조금 비겁해 보인다고 느낀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 날을 경험한 사람들이 오늘날 1980년의 5월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뀐 지금 우리는 역사가 된 5.18을 지금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는 물론 중요한 문제다.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의견으로 영화가 제작되었다면, 끝까지 이성의 영역에서 광수 문제를 다루었어야 했다. 그 날에 그를 본 목격자가 있다고 해도, 그와 함께 차량에 탑승한 이들의 증언이 어떻다 해도 김군의 정체를 밝히는 근거로는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 제작진으로서, 관객으로서, 김군의 정체를 찾고자 했던 목적이 이렇게 끝나버려도 정말 괜찮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