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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잌쿤 Oct 01. 2019

엘저넌에게 꽃을


대관령 양 떼 목장에 있는 양들은 식용으로 길러지는 동물들이 아니기에 도축당할 위험이 없다. 오히려 주기적으로 건강 상태도 체크해주고 털도 깎아주며 관광객들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평생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천하태평 인생이다. 어떨 때에는 이 양들의 삶이 부럽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본인이 울타리 안의 가축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담장 너머 인간들의 웃음과 장단에 맞추어 애교를 부리는 것만으로 배부른 삶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양들은 본인이 제한된 자유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진실 속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마냥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양들이 행복하다는 가정은, 양들이 인간들의 구경거리를 위해 길러지고 있다는 진실과 관계가 있을까?


양들이 스스로 울타리 안에 갇힌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이들의 행복에 어떠한 영향을 줄까. 어린 시절에는 오직 자유와 진실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탈출을 감행하던 트루먼의 용기를 숭고한 가치로 응원하기도 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쳇바퀴 같은 인생을 감내하는 현실을 성숙함이라 포장해버린다. 이솝우화 속에서는 배를 곯는 늑대가 정신승리를 하였지만, 목줄을 차는 것으로 안전하고 배부른 삶을 보장받는 개에게 누가 감히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때로는 모르는 것이 행복한 법도 있는 것 같다. 시온의 전사로 선택받아 하루하루 생존의 전투를 벌여가는 인간 중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매트릭스 안에서 안전하게 살았던 지난날을 그리워할 수 있다. 모르는 것은 못 견디게 만들어진 것이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알아버렸다'는 대가가 너무나 크게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금단의 영역을 알아버렸다는 것과 그것이 가져올 파급력에 대한 고찰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슬픈 이야기 이후로 꾸준한 철학적 논쟁거리가 되어온 것 같다. 그리고 그 논쟁의 초점은 보통 이것이 과연 정말 '슬픈 이야기'냐의 여부에 맞추어져 있다.


나는 사람들이 "찰리 고든 짓을 했다"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안다.
나는 부끄럽다.


'앨저넌에게 꽃을' 역시 지능이라는 선악과를 먹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한 인간의 슬픈 이야기를 다룬다. 찰리 본인은 '예전의 나도 똑같은 인간이었다'고 외치지만, 엄밀히 말해 예전의 찰리와 지금의 찰리가 '동일한 인간'은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아차리고', 서로를 '부끄러워하며' 숨어버린 것처럼, 찰리 고든 역시 자신의 과거를 알아차리고, 부끄러워했다. 기독교 철학에서는 인간이 몰랐어야 할 사실을 알아버린 이 행위에 대해 영원히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으로 치부한다. 에덴동산 이전의 인간과 이후의 인간은 다른 존재다. 차라리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앨저넌에게 꽃을'에서의 '알아차림'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과 다른 점은, 분명 '더 진보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더 큰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전제는 그대로 가져가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지능의 존재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찰리가 지나친 천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오히려 좌절을 느꼈음에도 그가 선택한 것이 이전의 저능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더 완벽한 두뇌 문제의 해결법을 찾고 자신만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미숙아들을 '진보된 인간'으로 고쳐주길 바랐다는 것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능이란 단지 행복과 무관한 것으로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애'를 깨닫기 위해 작용하는 성장과정 내의 필요조건으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모두 놓친 한 가지 사실을 이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능과 교육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타인과의 교감과 그에 따르는 인간애 때문이다. 예전의 찰리는 주변 동료로부터 인간애를 느꼈으며,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전의 찰리가 차라리 더 행복했다는 좌절에도 지금의 찰리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예전의 찰리는 애정을 받았기 때문에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바보처럼 그것이 애정이라고 믿었을 뿐이라는 점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진실된 애정이 아니면 그것은 가짜일 뿐이므로, 남들보다 월등해진 지식과 지능으로 그 차이가 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극적 전개가 최고조에 이르는 어머니와의 만남 장면에 이르러, 찰리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인간성'에 관한 트라우마를 온전히 극복함과 동시에 미숙아로서의 찰리와 천재로서의 찰리 사이에 느꼈던 괴리를 감정적으로 승화시키는 단계를 경험한다. 단기간의 지능 상승이 곧바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인 '인간애'가 단기간의 지능으로 학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미숙아 찰리에게 동생 노마가 보였던 미성숙한 모습과, 이제는 후천적 미숙아가 되어버린 어머니에게 성인 노마가 보이는 따뜻한 모습의 차이가, 가족에 대한 복잡한 심정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던 찰리의 가슴을 어쩌면 후련하게 만들어준 하나의 대답일 수도 있겠다.


찰리가 앨저넌에게 느꼈던 감정은 비록 갑자기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괴리감을 이해할 단 하나의 존재라는 동질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정상적인 인간'에 둘러싸인 자신과는 다르게 온전히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하는 앨저넌에 대한 미안함과 동정심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처음으로 되돌아가버린 찰리에게 주어진 나머지 일생은 찰리에게 보였던 주변인들의 감정이 아니라, 앨저넌에게 보였던 찰리의 감정에 더 가까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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