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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잌쿤 Jul 26. 2022

사양

다자이 오사무 저

MZ세대가 사회의 주축으로 자리 잡고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꼰대'라는 용어가 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일부 몰지각한 젊은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이 단어를 남용하면서 그 개념이 변질된 측면도 일부 있으나, 근본적으로 꼰대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의 인식도 변함에 따라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은 으레 있어왔던 것이므로, 어쩌면 꼰대란 사회 발전 과정에 있어 불가피하게 감당해야만 하는 성장통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꼰대가 만연한 과도기적 사회에서는 한편으로 세대 간의 통합을 역설하며 사회적 혼란을 줄이려는 노력이 있어, 그럭저럭 큰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변화의 크기와 속도가 사회의 적응 용량을 초과하는 경우다. 사람들의 인식 변화와 적응이 사회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혼란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급격한 변화라고 한다면 패전 전후의 일본만큼 드라마틱한 사례가 없을 것 같다. 무사(사무라이)의 시대였던 막부가 몰락하고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고 일본은 천황가의 몰락과 민주주의의 도입을 경험하게 된다. 천황 가문은 유지되었으나 정치적 실권은 전혀 없는 입헌군주제의 국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심지어 타의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점이다. 오랜 민중의 불만이 축적되어 폭발한 각종 혁명들을 통해 근현대화가 이루어진 서구의 국가들이나 임시정부를 필두로 해방 이후의 국가 체계를 오랜 시간 고민하고 준비했던 우리나라와도 다르게, 일본의 민중들은 하루아침에 국가가 패망하고 미군정이라는 외세의 개입으로 강제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천황의 가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아가다가 갑자기 보통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민중들이 스스로 국가의 주인으로서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니, 신으로 군림했던 천황과 그의 가문이 경제적 능력이 없어 농민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니, 그렇지 않아도 수동적인 기질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갑작스러운 현대화가 가져다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관이 '신분'에서 '돈'으로 옮겨간 변화는 일본인들에게 패전을 슬퍼할 겨를조차 주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에의 적응을 강요했음이 분명하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신분제 폐지가 공식화된 '평화헌법'의 제정에서 공표까지 걸린 기간은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중반, 다자이 오사무가 '사양'을 집필한 기간과 유사하며 이를 통해 사양의 집필 과정에는 일본의 현대화 과정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보인다.


사양에는 구시대를 대표하는 4가지 인물 군상의 상징으로서 4인의 등장인물이 극을 이끌어간다.


'어머니'는 자신들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처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전 세대의 귀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몰락하는 일본 제국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어머니는 우아하고 품위가 있는 귀족이었지만, 생활력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들며 결국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과거의 유산에 불과하다. 어머니 역시 남성인 삼촌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일 뿐이다. 다만 어머니는 귀족 시대의 몰락을 부정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으며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여름꽃을 좋아하면 여름에 죽는다'는 어머니의 말처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한여름날에 일본 제국은 패망했다.


'나오지'는 전통적인 방식의 귀족 제도에 매몰되어있는 인물이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불가피함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긴 하지만 이를 살아갈 만한 용기와 기개를 가진 인물은 아니다. 누나인 가즈코의 미래를 '돈 많은 집에 시집가서 남성에게 의지하는 삶' 이상으로 그리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면서도 귀족으로서의 체면치레를 위해 가산을 탕진하는 만행을 보이기도 한다. 나오지는 전쟁을 겪은 인물로서 일본 제국의 몰락을 직접 체험하였으며, 이 경험은 그에게 오직 아편 중독으로만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나오지가 문학에 탐닉한 것은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데카당의 삶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나오지는 새로운 세상에서 이를 유지할 만한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도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돈을 벌 능력도,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버릴 용기도 없었기에 어머니의 죽음, 그것은 곧 나오지의 세상이 죽은 것과 같았으며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상태로 치닫게 되고 말았다.


'우에하라'는 몰락한 귀족을 상징하는 나오지와 달리 몰락한 천민, 또는 몰락한 남성 권력을 상징한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떠도는 과거의 영역은 비단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아내와 아이를 배급소에 보내고 남의 돈으로 매일 술을 마시러 다니면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우에하라는 무능력한 남성의 전형이다. 우에하라와 나오지는 서로의 세속적, 귀족적 가치관을 경멸하면서도 서로를 부정하지는 못하는 관계이다. 우에하라는 천박한 인물이기에 나름 품위가 있었던 아내와 결합하지 못하고, 나오지는 그러한 우에하라의 아내에게서 어머니와 같은 품격을 느끼지만 결국 귀족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끝내 이 결합을 시도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가즈코'는 다자이 오사무 본인의 바람을 담은 메리 수(Mary Sue)로서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하나의 정답이자 이상향이며, 작가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한탄으로 빚어낸 존재이다. 비록 다자이 본인은 이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보였으나, 소설 속에서만큼은 희망적인 결말을 내세우고자 하였을 것이다. 본래 귀족이란 노동도 생산도 하지 않는 존재이며, 먼 길을 떠나지도 않고 자신의 영지에서 하층민들의 땀으로 일궈낸 산물을 상납받는 존재이다. 그러나 가즈코는 아버지의 터전을 떠나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기꺼이 밭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귀족이란 하층민을 '찾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불러들이는' 존재이다. 그러나 가즈코는 우에하라가 자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직접 하층민들의 처소로 임하여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혁명적 결합을 시도한다.


저는 다만 제 생명이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파초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고 썩어 가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절로 썩어 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예감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대학'에 어긋나더라도 지금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는 상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좋은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로막는 도덕을, 밀쳐낼 수 없나요?


가즈코와 우에하라의 아이는 귀족과 하층민으로서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던 이전 세대 간의 통합을 상징하며, 그 방법이 부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점에서 기존 윤리관에 대한 혁명적 타파를 의미한다.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보낸 3번의 구애 편지는 여대학, 상식, 도덕의 3가지 기성 가치관을 각각 부정하는 행위로 본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사양은 전후 사회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결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는 신분제의 운명에 대해 애착과 초월, 극복이라는 양면성을 내포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다자이 오사무에게 있어 혁명이란 이전 시대의 상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하는 열망이었을 것, 그리고 가즈코가 이전의 도덕과 상식을 모두 무너뜨리면서 아이를 잉태하는 행위는 작가 본인으로서도 혁명적인 상징성을 갖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우에하라 씨는 후후 웃으며,
"하지만 이미 늦었어. 황혼이야."
"아침이에요."
동생 나오지는 그날 아침, 자살했다.


어머니의 임종과 비로소 가즈코가 직접 행차하여 우에하라를 만난 사건은 시대 전환의 정점을 가리키는 지점이다. 나오지와 우에하라는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가즈코는 이것을 시작이라고 인식한다. 이 변화의 시작점이 가즈코라는 점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가즈코는 페미니즘적 가치관이 투영된 캐릭터로, 여성으로서 부계 중심의 과거 사회에서 탈피하고 스스로 혁명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세대의 잉태를 선택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성의 전유물인 신분제가 무너지고 전쟁에서 패하면서 이러한 사태를 겪게 되었으므로, 진취적인 가즈코의 모습은 곧 남성 시대의 무력감과 공허함에 대한 반발심이다.


가즈코가 일으킨 뱀알 사건과 화재 사건이 어머니의 병환을 가속화하며 죽음을 앞당기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혁명적인 시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가즈코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견딜 수 없는 공포와 근심을 느끼지만, 절망감을 극복하지 못한 나오지와 달리 이 변화가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처연히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죽을 때까지 귀족이었던 나오지는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꼰대가 되어 죽었고, 한 때 귀족이었던 가즈코는 그렇게 과거의 유산을 파괴하고 거칠고 천박한 여자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아이가 태어나는 자양분이 된다.


뱀 알.
화재.
그 무렵부터 아무래도 어머니는 누가 봐도 환자 모습이었다. 반면에 나는 점점 거칠고 천박한 여자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어쩐지 내가 어머니로부터 끊임없이 생기를 빨아들여 피둥피둥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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