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바람이 짓는 농사 이야기
밀농사를 지을거야.
농사를 짓는다니.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내가 그런 단어를 감히 입에라도 담을 수 있는걸까. 언감생심 펜대만 굴리고 자판이나 두들기던 주제에 농사로 먹고 살 수는 없겠지만 먹을거리를 기르는 농부이고 싶었고, 밀농사를 짓고 그걸로 누룩도 만들고 빵도 만드는 꿈을 꾸었다.
순창의 작은 마을. 이름만 들어도 반짝반짝 빛이 날 것 같은 동네, 주월리에 청년공유주택 더집이 있다. 그곳에서 살게 된 나는 아침 해가 뜨면 일어나 창틀에 앉아 해 뜨는 걸 바라보았다. 매일 강이 흐르고 강 너머 산 아래에는 커다란 두 그루 느티나무가 이야기를 건냈다. 그 풍경들이 너무 좋아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너무 좋아서 해가 뜨면 반짝 눈이 떠졌다. 서울에 살던 20년 동안 매일 같이 5분만... 5분만... 알람을 뒤로 미루고 숨이 턱에 닿도록 전철역으로 내달리던, 정시출근보다 지각을 더 자주 하던 내가 말이다.
매일 아침 나를 반기는 큰 나무 바로 아래 개망초가 무심하게 피어있는 그 밭이 있었다.
‘어? 이 밭은 묵은 밭인가?’
면적도 아담하니 나 혼자 농사짓기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농사를 책으로만 배운 귀농꿈나무인 나는 ‘아무리 초보라도 자연농을 해보자! 무경운으로 몇 년 고생하면 땅이 저절로 곡식을 가꿔줄거야! 밀은 겨울에 먼저 자라니까 풀 매느라 고생할 일도 적을거고, 나는 손 안대고 코 푸는 농사를 쉬엄쉬엄 지을거야!’ 내심 이런 계산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길을 오가며 혹시나 누가 농사를 짓나 염탐을 하고 그 땅에 침 발라 놓기를 한 계절이 지나고, 두 계절이 지나 가을이 왔다. 염탐만 할 수는 없었다. 이 계절을 놓치면 한 해가 지나야 시작을 할 수 있으니까.
“아저씨, 강 건너 큰 나무 아래 땅이요. 거기는 농사를 아무도 안 짓는가요? 제가 쫌 빌렸으면 쓰겄는디...”
“뭐 허게? 거그는 동물들이 많이 내려와서 못 써.”
“저 밀을 좀 심구게요. 고라니, 멧돼지가 밀도 먹을까요?”
“그려? 밀은 잘 몰르겄는디. 글믄 내가 땅주인을 아니께 함 얘기를 넣어줄게.”
그렇게 여차저차하여 나는 큰 나무 아래 개망초밭의 농부가 되었다! 땅을 구한 기쁨과 함께 나의 마음도 바빠졌다. 자연의 시간은 빨리 밀을 심으라고 재촉하며 겨울을 향해 갔고, 나는 이웃의 귀농 선배님께 전화를 걸었다.
“형님, 예초기 좀 빌려주세요.”
“니가 하게?”
“예! 제가 해 보게요. 근데 조금 가르쳐주셔야 해요. 헤헤”
시작부터 순탄할 리가 없었다. 윙 돌아가는 예초기가 겁이 나긴 했지만, 키를 넘는 풀이 우거진 잡초밭에 낫 하나로 맞설 수는 없었다. 칡이 어떻게 엉금엉금 뿌리를 내리는지, 개망초는 키가 얼마나 큰지, 쑥대밭은 왜 쑥대밭인지 몸으로 배우고 시작했고, 잡초들은 자기들의 터전을 수이 내주지 않았다. 풀 베는 일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땅 속에 파묻힌 검정비닐, 걸핏하면 도르륵 예초기를 감아도는 노끈 뭉치, 지난 농사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땅 속에 남아 있었다. 초보 농부의 발걸음 소리에 고라니가 껑충 튀어나와 산으로 뛰어갔고, 예초기를 돌리면 꿩이 푸드덕 거리고 날아가고 두꺼비가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을 가곤했다. 청딱다구리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초보농부를 비웃었다. 얼른 풀 베고 씨앗을 뿌리겠다는 나의 계획은 점점 더뎌졌다. 밤이면 팔꿈치와 어깨가 아파서 끙끙 거리고 아침이면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그렇게 스무날 정도 끝날 것 같지 않던 날들이 지나가고 드디어 흙이 속살을 드러내던 날, 밀 씨앗 한 푸대를 수레에 싣고 가는 나에게 마을 어르신은 “새 모이 주러가? 시집이나 가라.”하며 놀리셨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낑낑 수레를 끌고 저 너머 사래긴 밭으로 올라가 씨앗을 뿌렸다. 새가 먹는다고 하니 한 웅큼 더 뿌리고, 너무 많이 뿌렸나 아니면 적게 뿌렸나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싹이 과연 나기는 나는 걸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 조바심이 무색하게도 여린 싹들이 겨울을 날 에너지를 다 품고서 파릇하니 돋아났고, 그 다음해 봄, 나는 첫 수확을 하였다.
‘밀을 20kg 뿌렸으니까 아무리 적어도 500kg는 나오지 않을까? 500kg 나오면 함양에 있는 제분소에 가서 밀가루를 빻아다가 일부는 팔고 일부는 빵도 만들고...’
콤바인이 자루에 밀을 쏟아냈다. 한 자루, 두 자루, 세 자루... 세 자루. 120키로가 안 되는 양. 한 번도 밀을 팔아 부자가 되리라 상상한 적은 없었지만, 초보 농부의 어설픈 농사는 임대료도 낼 수 없는 소꿉장난이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도 같았지만, 사실 기쁜 건지 슬픈건지 억울한 건지 모르겠는 감정이 들었다. 마을 회관 앞에 밀을 널어 말리는데, 동네 할머니들이 다 나와서 구경을 하셨다.
“예전엔 우리도 다 밀을 심궜지. 밀이 참 통통하니 잘 뒤았네.”
“하고메이. 밀을 워따 심궜대. 고생 했겄네.”
할머니들은 토닥토닥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밀과 함께 섞여 들어온 온갖 풀이며 검불들을 걷어내는 저마다의 방법들을 일러주셨다. 나는 왠지 농사로 인정받은 것 같은 뿌듯한 기분마저 들어 다시 행복해져버렸다. 밀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치가 열배가 된다 해도 나는 내 밀을 팔고 싶지 않았다. 꼭꼭 감춰두고 누가 달라해도 내 주고 싶지 않은 내 밀.
지금 나는 그 밀로 빵을 만든다. 내 눈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밀밭에서 다른 풀들, 벌레들과 함께 생존한 10%의 밀이니까 씻을 때도 한 톨이라도 도망갈까 조심조심 쓸어담아 햇볕에 말려서 밀을 빻는다. 나의 밀밭, 나의 밀가루, 나의 빵. 그렇게 나의 로망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