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밀항
배고픈 시절이었다.
제주도는 벼농사가 어려워 제삿날이나 명절이 되어서나 육지에서 들어온 귀한 쌀밥을 먹어볼 수 있었다. 광보 삼춘이 일본으로 밀항가기 전까지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못했다고 하니 1950, 60년대 제주도가 얼마나 살기 어려운지 가늠하기 충분했다.
먹는 것이 귀한 그때, 마을에 제사라도 지내는 집이 있으면 동네가 시끌 했다.
“제주 말에 이런 말이 있어. 제사지내는 아이는 건드리지 마라는 말이 있어. 평소에는 아무리 약한 아이라도 제삿날에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야. 그 아이에게 잘 보여야 나중에 제사음식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잖아. 그렇게 먹을 것이 귀할 때였다고.”
과거 제주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나면 음식을 나눠 먹었다. 물론 음식을 작게 하는 제사에서는 나눌 여유가 없었지만 음식을 큰 제사인 경우에는 이웃과 음식을 나누었다. 그런 날에는 제사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마을 우물가에서 제사에 쓸 제수를 다듬었다. 그러니 오늘 누구네 집 제사라는 것은 금방 알ㄹ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제삿날을 모두 아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우리 화북만 해도 4.3때 한 날, 한 시에 죽은 사람들이 수 십 명이야. 그러니 제사음식을 하면 같은 날 제사지내는 집이 많았다고. 온 동네가 제사음식 냄새로 가득해. 그러니 철없는 우리 같은 아이들은 무슨 날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음식 먹을 생각에 막 기대하고 그랬지”
그랬다. 누구는 죽음을 슬퍼하며 먼저 간 이를 애도하지만, 누구는 그 슬픔 가득 준비한 음식을 기다리며 또 다른 시간과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 아이들 역시 그런 음식을 먹으며 다음 세상을 살아갔다.
“문전상이라고 있어. 본제사상 말고 집안을 지키는 신들에게 음식을 바치는 거지. 이 문전상은 문 앞에 놓거나 초가집 창 앞에 간단하게 차려놓거든. 그리고 방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아이들이 밖에서 창으로 이 문전상 음식을 모두 가져가 버려. 먹으려고. 그러니 제사 지내던 사람들이 문전상 음식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얼마나 놀라겠어. 그만큼 제사음식을 도둑질 할 정도로 먹고 살기 힘들었어.”
그래서 이들은 떠나고 싶었다. 제주를 떠나 육지든 어디든 가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시기에 밀항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한집 건너 한집 밀항간다 할 정도로 밀항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3년 일본 경찰청의 발표에 의하면 일본 내 불법체류자는 모두 5만여명 정도라고 밝혔다. 같은 해 일본으로부터 밀항을 시도하다 잡혀 강제송환된 100번째 송환자들이 김해공항을 통해 들어왔는데 이때까지 송환된 인구가 모두 2만1239명이었다. 따라서 송환된 사람과 일본내 불법체류하는 사람을 합치면 7만여명의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하였고, 이들 중 대부분은 제주사람들이었다.
“나도 일본에 있는 백부가 밀항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밀항을 갔지. 1961년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봄에 연락이 와서 부산으로 건너갔지. 거기서 한 보름 정도 있었는데 5.16이 딱 터진거야. 시국이 불안하니까 밀항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상황이었거든. 그래서 그해에는 밀항을 가지 못했지. 백부로부터 일단 돌아가서 기다리라는 연락을 받았지. 그래서 부산에서 제주로 다시 내려왔어. 금방 나갈 줄 알았는데 1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더라고. 학교로 복학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다가 1년만에 백부로 부터 연락이 왔지. 다시 부산 외숙모 댁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었어. 그곳에서 밀항 연락책이 와서는 새벽에 배를 타라는 거야. 배를 타라고 하기 전에 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절대 아는 척을 하지 말라, 절대 말을 하지말라는 다짐을 받았어. 그리고는 새벽에 연락책이 안내해 준 배를 탔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여수로 가는 배라고 누군가 말을 했던 거 같아. 그런데 그 배를 타니까 한 20여명 있는데 우리 화북 친구들이 5~6명 있는 거야. 어떻게 연락이 되서 그 배를 탄건지 모르지만 아는 척을 하지 말라고 해서 우리는 눈만 꿈뻑이고 말을 하지 않았어. 여수를 가던 배는 어느 작은 섬에 우리를 내려주더라고. 그리고는 그곳에 사는 사람 집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다가 새벽에 다시 나룻배를 타라고 해서 나룻배를 탔어. 나이든 사람들이 먼저 타고 우리 젊은 아이들은 나중에 탔지. 나룻배는 바다 가운데 있는 밀항선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는 연락선 역할을 하더라고. 나룻배를 기다리며 친구들끼리 인사를 했지. 알고 보니 그때 밀항 가는 사람들이 모두 제주 사람들이더라고. 밀항선에 타고 나니 배가 출발을 하는데 조금가다가 어느 무인도에 정박해서는 내려 주는거야. 그때 밀항선을 타던 사람들 중 사기당하는 일이 있었어. 밀항선들이 밀항하는 사람들 돈을 받고는 조금 가다가 일본이라고 사람들을 내려주는데 거기가 한국 무인도 같은 곳에 내려준거지. 그래서 우리도 그런 줄만 알고 선장한테 막 따졌거든. 그랬더니 선장이 조근조근 설명을 해. 여기서 3시간 동안 머물다 출발하는데 그 이유는 일본해상경비함이 지나가는 시간을 피해 가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해산물이라도 잡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출발하겠다, 오늘 밤 9시면 일본 고쿠라 항에 도착할테니 걱정마라는 선장의 설명이었어. 과연 3시간 후에 출발하더니 그날 밤 9시에 고쿠라 항에 정확하게 도착하더라고.“
고쿠라 항에 사람들을 내려주고는 곧바로 배는 떠났다. 그곳에 도로공사를 위해 모래를 쌓아 놓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 몸을 숨기고 있으니 잠시 후에 재일교포 브로커와 일본여관 주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인원을 확인하더니 일본 여관주인 안내로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관에 들어가니까 밥을 주는데 아 흰 쌀밥을 주더라고. 그리고 노란 다꾸앙(단무지) 반찬도 주더라고. 처음 먹어보니 신기하더라고.“
그렇게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부터 일본내에서 거주하고 있는 가족이나 친척들이 여관으로 찾아와 밀항인들을 데려갔다.
“절대 교포 브로커가 가족이나 친척을 안만나. 여관 주인이 이름과 밀항비를 받고 나서 방으로 올라와서 교포 브로커한테 확인하고 돈을 건네면 밀항한 사람을 내보내줘.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더라고.“
그렇게 함께 밀항왔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지 백부가 오지 않았다. 보름이나 지났지만 오지 않았다. 결국 교포 브로커는 광보 삼춘을 데리고 직접 오사카에 가서 돈을 받고 보내주기로 했다. 대판으로 가는 동안 열차를 타야하는데 혹시 모를 검열에 대비해서 입안에 솜을 물고 가야 했다. 치아문제로 말을 못하는 것처럼 해서 밀항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는 수단이었다. 가는 동안 교포 브로커는 백부로부터 밀항비를 받지 못하면 광보 삼춘을 인신매매범들에게 넘겨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인신매매 당하지 않으려면 백부에게 잘 말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백부 집에 도착하자 백부는 광보 삼춘을 2층으로 올려보냈다. 시간이 좀 흐르자 아랫층에서 큰소리가 났다. 백부가 밀항비로 10만원을 주기로 했는데, 막상 데려오니 5만엔을 내민 것이다. 이에 교포 브로커는 나머지 5만엔을 받으러 꼭 오겠다면 욕을 하며 나갔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백부에게 왜 고쿠라항으로 데리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더니 일부러 안왔다는거야.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니 백부 대답이 기가 막혀서. 우리와 같이 밀항을 했던 할머니가 한분 계신데 그 분은 아들이 데리러 와서 먼저 여관에서 나갔거든. 그런데 그 할머니가 간 곳이 우리 백부 집과 가까운 곳이었대. 그래서 백부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는구만. 그런데 그 할머니가 데리러 가지말고 기다리면 브로커가 올테니 그때 돈을 적게 주면서 배짱을 부리라고 했나봐. 그 말을 백부가 듣고는 그대로 한거지. 그래서 내가 백부한테 아 진짜 나를 인신매매범들에게 팔아버리면 어쩌려고 그랬냐고 하니까 그럴 일 절대 없다고 자신을 하는 거야. 내 기분이 어떻겠어?”
그렇게 광보 삼춘의 일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